17년 살아남은 명작, 특별한 모텔 열쇠의 비밀
[김성호 기자]
바야흐로 콘텐츠의 시대다. 스크린이 있는 극장에 가야 제대로 된 작품을 만날 수 있던 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제작자는 OTT 서비스 업체를 거쳐 작품을 바로 시청자의 안방까지 배송한다. 콘텐츠의 시대가 곧 극장의 위기가 될지 눈 밝은 이들조차 쉬이 예상하지 못했던 터다.
콘텐츠의 시대, 영화에 온 힘을 경주했던 이들은 위기를 겪고 있다. 90분 내외의 한 작품에 온 공력을 들이기보다 훨씬 짧거나 긴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를 시도하는 것이 수익 면에서 낫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작품성이 떨어졌다면 대중의 관심 또한 멀어졌을 테다. OTT 업체들의 번영 뒤에는 영화에 거의 근접하는 수준까지 쫓아온 드라마의 수준 향상도 한 몫을 했다. 미드, 영드, 일드 등 세계 곳곳에서 건너온 드라마 여럿이 톱스타가 나오는 한국 드라마 못잖은 인기를 누렸다.
▲ 로스트 룸 포스터 |
ⓒ Syfy |
17년 살아남은 명작 드라마
<로스트 룸>은 2006년 미국 Syfy 채널에서 방영된 3부작 드라마다. 짤막한 분량의 TV시리즈가 제법 제작되는 미국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으로, 사후 콘텐츠 발매에선 각 부를 둘로 나누어서 6회 차로 출시됐다. 한국에서도 <지옥> 등 넷플릭스 출시 드라마가 비슷한 분량으로 나오는 경우가 생겼지만 미국에선 일찌감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선까지만 제작하여 사후 판매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로스트 룸>은 제작 후 17년이 넘게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한 관심을 받는 명작으로 남았다. 방영시기가 지나면 사장되고 말았던 기존 드라마 시장이 OTT 등장과 함께 재조명받은 것도 결정적 이유가 됐다. 분량이 길지 않고 6부를 몰아보면 영화 두 편을 조금 넘는 정도란 점도 부담이 없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시간의 격차를 느끼지 않게 하는 창의적 소재와 단단한 연출이 한 몫을 했다.
▲ 로스트 룸 스틸컷 |
ⓒ Syfy |
문이 있는 곳이라면 세상 어디든
주인공은 경찰 조 밀러(피터 크라우즈 분)다. 살인사건을 쫓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평범해 보이는 모텔 열쇠를 습득한다. 그런데 이 열쇠엔 특별한 능력이 감춰져 있다. 열쇠구멍이 있는 세상의 모든 문을 열 수 있고, 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바로 데려다줄 수 있는 것이다.
아무 문에나 대고 열쇠를 돌리면 특별한 모텔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나올 때면 세상 어느 곳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때로는 휴양지의 오두막집이기도 하고, 친구 집 방문이기도 하며, 경찰서 내부나 주점 화장실, 심지어는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 경기장 안으로도 조는 아무렇게나 옮겨갈 수 있다.
▲ 로스트 룸 스틸컷 |
ⓒ Syfy |
특별한 능력 지닌 물건을 보는 재미
처음엔 수사 목적으로만 열쇠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조다. 하지만 열쇠의 능력을 이용하던 중 딸을 잃어버리며 막바지까지 내몰린다. 열쇠를 갖지 못한 사람이 열쇠 안 모텔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다시 문을 열어도 그를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게 이 열쇠의 규칙이었던 것이다. 딸이 모텔 방 안에서 사라진 뒤 조는 딸을 되찾으려 다른 오브젝트를 찾아 헤매게 된다.
드라마는 오브젝트를 모으려는 이들, 오브젝트를 모아 파괴하려는 이들, 심지어는 오브젝트를 신성시하는 종교단체까지를 등장시킨다. 이 가운데서 조 역시 오브젝트에 깃든 힘을 통해 딸을 되찾기를 꿈꾼다. 모두 6편으로 나뉜 시리즈는 시청자를 조의 재난 가운데 떨어뜨리고 거듭된 시험을 제시한다.
▲ 로스트 룸 스틸컷 |
ⓒ Syfy |
물건이 인간에게 자유를 줄까
흥미로운 건 능력이 사람 본연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가장 강한 오브젝트를 가진 이도 결국은 다른 이와 똑같은 인간이다. 잠시 잠깐 물건을 가져 제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인 듯 여기는 이조차 그 물건을 잃으면 평범한 사람이 된다. 심지어는 그 물건을 갖기 전보다 더 아무것도 아닌 상실감에 허덕이는 인간이 되기 십상이다.
<로스트 룸>은 물욕에 매인 인간의 모습을 일깨운다. 물건에 집착하여 제 존재가 마치 소유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인 양 여기는 세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물건을 갖기 전보다 삶이 나아지지 않았음에도, 때로는 그 대가가 물건의 가치보다 훨씬 더 큼에도 끝내 물건을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을 등장시켜 욕망과 두려움에 거듭 갉아먹히는 못난 인간의 운명을 돌아보게 한다.
<로스트 룸>은 짧은 분량에도 미국 드라마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꼽히는 명작 가운데 한 편이 되었다. 이는 판타지 장르 드라마가 흔치 않은 탓이기도 하겠으나 드라마의 참신성이며 그 안에 담긴 함의 등 즐길만한 거리가 많은 덕분이기도 하다.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이 십년을 넘어 이삼십년, 심지어는 한 세기를 내다볼 수 있는 세상이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오늘날의 독자가 여전히 읽고 있듯, 어쩌면 오늘의 드라마를 미래 세대 시청자가 보고 즐길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로스트 룸>과 같이 재미와 의미를 다 잡는 한국 드라마가 등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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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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