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내보낸 폭스뉴스, 美대선 개표기업에 1조원 배상한다
지난 미국 대선을 ‘사기’라고 주장하며 투·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집중 보도했던 미국 폭스뉴스가 해당 업체에 1조원이 넘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주게 됐다. 미국 역사상 언론사가 명예훼손 소송으로 지급한 합의금 중 최고 액수다.
18일(현지시간) AP통신과 CNN방송·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폭스뉴스는 2021년 자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투·개표기 업체인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도미니언)에 7억8750만 달러(약 1조391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소송을 종료하기로 합의했다. 판사가 이 합의안을 수용하면 이번 소송은 재판 없이 마무리된다.
앞서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는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패배하자, 28개 주에 투·개표기를 공급한 도미니언이 조 바이든 당시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투표 결과를 조작했다는 음모론을 지속적으로 퍼뜨렸다. 도미니언이 개표기를 조작해 트럼프를 찍은 표를 바이든의 표로 바꿔치기 했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도미니언은 2021년 1월, 폭스뉴스에 16억 달러(약 2조1200억원)의 배상금을 청구하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폭스뉴스는 지난해 미국 델라웨어주 상급법원에 도미니언의 소송을 각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기각됐다. 이 과정에서 폭스뉴스 내부에서도 유명 진행자나 프로듀서‧고위 간부 등이 부정선거 주장에 대해 “무모하다”고 지적했다는 e메일과 증언도 공개됐다.
이날 폭스뉴스와 합의한 도미니언 측 저스틴 닐슨 변호사는 기자들에게 “진실은 중요하며 거짓말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말했다. 폭스뉴스는 성명을 통해 “도미니언에 대한 우리의 특정 주장이 거짓이라고 판단한 법원의 판결을 인정한다”고 했다. 도미니언에 대한 별도의 사과는 없었다.
이어 폭스뉴스는 “분열적인 재판 대신 도미니언과 분쟁을 우호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면서 “우리의 이번 합의를 통해 국가도 이 문제(부정 선거 논쟁)에서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입장을 밝혔다.
CNN은 8억 달러에 달하는 이번 합의금이 역대 언론사 소송 중 최대 금액이라고 강조했다. 폭스뉴스 현금 보유분인 40억 달러(약 5조원)의 20% 수준으로, 향후 기업 경영에도 상당한 타격을 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기존 최고 기록은 2017년 ABC뉴스가 육류 가공업체 비프 프로덕트에 지급한 1억7770만 달러(약 2300억원)였다.
NYT는 이 같은 거액의 합의금에도, 선동적인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내보내는 폭스뉴스의 관행이 바뀌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CNN 역시 폭스뉴스가 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보도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디어 업계 일각에선 도미니언이 합의하지 않고 끝까지 재판을 끌고 가 폭스뉴스의 경영진과 진행자를 재판장에 세워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이들의 부도덕을 재판장에서 폭로할 기회가 사라졌다고 CNN은 전했다.
다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실제 재판이 진행됐더라도 ‘언론·출판 등의 자유’와 관련된 미국 수정헌법 1조에 따라 폭스뉴스 경영진들의 책임을 입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대법원은 1964년 언론의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매체가 ‘실제 악의(actual malice)’를 갖고 거짓 보도를 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한 바 있다.
폭스뉴스는 이번 합의로 도미니언과의 소송은 끝났지만, 또 다른 개표 시스템 업체인 스마트매틱이 제기한 두 번째 명예훼손 소송을 앞뒀다. 스마트매틱은 폭스뉴스에 27억 달러(약 3조6000억원)의 배상금을 요구한 상태다. NYT는 “스마트매틱과의 소송에선 이번과 유사한 합의가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고 전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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