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변 안 나와 병원 찾은 노동자... 직업병 의심한 이유

이정엽 2023. 4. 1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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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보내는 편지] 세척제 사용 후 소변 멈춘 노동자... '직업병 안심 센터' 활용법

[이정엽]

어느 날 50대 남성의 외국인 환자가 응급실을 방문했다. 구토, 복통과 설사를 호소했는데 특이한 점은 전날부터 갑자기 소변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응급실에서 시행한 피검사 상 다른 수치는 큰 이상이 없었으나, 신장 기능이 기준치의 10%로 매우 낮았다.

신장은 우리 몸의 노폐물과 불필요한 수분, 무기질 등을 소변으로 내보냄으로써 혈액의 성분을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신장이 기능을 멈추게 되면 몸속 체액이 과다해져 폐에 물이 차는 폐부종이 생길 수도 있고, 혈중의 칼륨 농도가 과도하게 증가해 심장 마비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 환자는 다른 병력이 있어 주기적으로 외래를 방문하던 분이었는데, 그동안의 신장 기능은 항상 정상에 가까웠고 소변을 보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급성신부전을 의심했다. 이 환자는 신장 기능을 대신해 줄 혈액 투석 치료가 우선 필요한 상황이었다. 우리 병원에서는 야간 혈액 투석은 불가능한 상황이라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보내 응급 혈액 투석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이후 다시 본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게 되었다. 수액 공급과 혈액 투석을 지속하자 다행히 환자의 신장 기능은 급격히 좋아졌고 소변도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직업병 안심센터가 일터에 숨겨진 직업병을 드러내는 데 제대로 역할하려면 더 필요한 것들이 많다.
ⓒ 직업병 안심센터 홈페이지
 
신장기능 저하, 왜?... 세척제 속 알 수 없는 화학 물질 노출로 인한 발병 의심
그런데 이 환자에서 신장 기능이 갑자기 떨어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응급실 방문 당시 활력 징후나 신체 진찰, 소변 검사에서 탈수의 소견은 없었고 초음파에도 신장 기능 저하를 일으킬만한 구조적인 원인은 보이지 않았다. 최근 신장 기능을 떨어뜨릴 만한 약을 먹은 적도 없었다. 단서가 잘 잡히지 않아 여러 가지를 물어보던 중, 평소에 하던 일을 물어보는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을 발견했다.
 
"병원 오시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나요?"

"원래 가공 일을 하다가 최근에는 그만두었고, 병원 오기 전날에 딱 하루 세척하는 일을 했어요."

"몸이 아프기 시작한 건 정확히 언제쯤이었나요?"

"거기 하루 일하고 퇴근해서 집에 왔을 때부터 갑자기 소변이 전혀 안 나오고 배가 아프고 구토하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전혀 그런 증상이 없었어요. 하루 자면 괜찮겠지 했는데 그다음 날이 되어도 마찬가지라 응급실에 오게 됐어요."

그는 취업을 위해 2006년에 한국에 입국했고 이후 조선업, 용접, MCT 가공 등의 일을 했으며 응급실 방문 전날 인력소개업체를 통해 한 화약 공장에서 8시부터 17시까지 하루 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세척제 사용이라는 새로운 업무 직후 증상 발생, 업무와 질병 간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는 근무 시간 내내 더운 야외에서 에어건을 이용해 제품을 세척하고 걸레로 제품을 닦아내는 일을 했단다. 먼지가 많고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보호구는 방독 마스크가 아닌 KF94 마스크를 썼다고 했다. 세척제의 성분은 알 수 없었다. 작업하는 동안에는 특별히 눈이나 피부 등에 자극 증상은 없었고 일일 파견으로 간 곳이라 다른 노동자들에게서도 비슷한 증상이 발생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 환자의 동맥혈 가스 검사 결과, 유기용제 등 화학 물질에 중독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소견이 보였다. 작년에도 세척제 사용으로 인한 집단 독성 간염 사례가 몇 차례 발생한 만큼 '세척제 사용'은 직업병 발생을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는 단서였고, 일부 성분의 세척제는 드물지만 신장 손상도 유발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국회 앞에서 노동안전보건운동 단체 활동가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배제, 혐오에 금지표시를 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 반올림
 
나는 '직업병 발생이 의심되는 이 상황을 노동부에 신고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최근 이렇게 직업병이 의심되는 환자가 있을 때 연계할 수 있는 '직업병 안심 센터'가 새로 생겼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곳에 연락하고 환자와 관련된 내용을 전달했다.

우선 그가 일했던 사업장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정확한 작업 환경, 세척제 성분, 노출 정도를 파악할 수 있지만 그는 정확한 회사명이나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만약 정말로 해당 작업이 원인이라면 직업병이 집단으로 발생할 위험도 있기에 이 회사의 소재를 알아내도록 여러 차례 설득해보았지만, 그는 취업에 불이익을 걱정해서인지 더 이상 조사가 진행되는 것을 매우 꺼렸다. 사업장에는 개인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다며 안심시켜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단순 직업병 의심 사례 보고로 이 사건은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그 환자는 무사히 회복되어 퇴원했다. 결국 이 병의 원인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후속 조치도 잘 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의심하는 것 자체가 직업병 발견의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그 환자가 처음으로 방문한 응급실에서도, 응급 투석을 위해 전원 된 대학병원에서도 이 환자에게 갑자기 왜 병이 발생했는지는 누구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상 의사 입장에서는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보니 업무 관련성과 같은 '발생 원인'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환자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의료진은, 직업환경의학과 보다는 다른 임상 의사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들이 잠깐이라도 작은 의심이라도 하고 연계해 주는 과정이 없다면, 상당수의 직업병은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환자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전국 각지에서 문 연 '직업병 안심 센터'... 더 많은 직업병이 수면 위로 드러나길

마침 작년부터 고용노동부 산하 기관인 '직업병 안심 센터'가 전국 각지에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직업병이 의심되는 환자가 발생하면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의사, 간호사 등 의료기관 종사자 누구나 전화 한 통으로 의심 사례를 보고할 수 있다. 보고자에게는 사례금 지급, 노동자에게는 의료비 지원 등이 가능하다.

특히 사업장에는 노동자 개인 정보가 전달되지 않으니 안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만하다. 또한 일단 접수가 되면 전문가들에 의해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지며 필요시 노동부 등과 협력하여 현장 조사를 시행하게 되므로 원인 파악 및 재발 방지에도 효과적이다.

많은 노동자와 의료진들이 항상 질병의 원인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 의심 사례를 발견하면 직업병 안심 센터에 연락하여 그동안 숨겨져 있던 많은 직업병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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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쓰신 이정엽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후원회원이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입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지 <일터> 4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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