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사업장 안전보건사업이 공회전하지 않으려면
[최영철]
"사장님, 세척제를 저렇게 대야에 담아 놓고 걸레로 첨벙첨벙 적셔 쓰시면 어떡해요. 오염된 걸레도 아무데나 수북하게 쌓아 놓으시고. 저희가 매번 올 때마다 소분 용기랑 걸레 수거함 쓰시라고 말씀 드리잖아요. 저 국소배기장치 덕트는 언제 설치하신 거예요? 얼핏 봐도 한 10년 넘게 청소 안 하신 것 같은데."
"국소배기장치 덕트는 건물주가 못 하게 해. 구청에서도 민원 들어온다고 계속 뭐라고 하고. 걸레통은 그냥 마대자루에 넣어 놓는 게 제일 편해. 세척제 대야는 이 인쇄소 생겨날 때부터 썼어. 그래도 다들 멀쩡해. 주변에 다른 곳들도 다 이렇게 해."
작은 인쇄소에 방문할 때마다 반복되는 대화다. 작은 전자, 금속, 기계 제조업체들도 상황은 똑같다. 변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반복되는 상담과 교육은 말하는 이도 말을 듣는 이도 무기력하게 만든다.
▲ 한 인쇄사업장에서 톨루엔 성분의 세척제가 담긴 용기가 개방되어 있고 오염된 폐걸레들이 방치되어 있다. |
ⓒ 최영철 |
작은 사업장 안전보건 사업의 공백
일터의 작업환경은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개선과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도 많다. 낡은 장비의 기계적 한계, 생산품질을 위한 작업공정의 제한, 시장경쟁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장시간, 야간, 교대근무, 주변의 민원에 대한 고려 등, 어디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설비 도입, 화학물질 변경, 보호구 착용, 건강검진 등과 같이 단일하고 간단한 해결책은 대안이 될 수 없다.
노동자 안전보건을 관할하는 기관들과 부서들에서는 여러 가지 재정지원 사업, 기술지원 사업, 민간위탁 사업 등 매년 정해진 사업 '물량'을 통해 작은 사업장 안전보건에 관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분명하고도 커다란 간극이 있다. '관할 기관들에서 이미 많은 예산과 사업을 통해 지원하고 있음'과 '법적인 요건은 준수하지만 변하지 않는 일터의 작업환경' 사이의 간극이다.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지만 진행하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알 뿐 그 사업이 목표로 하고 있는 곳에서는 별다른 것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 간극이다.
한 가지 사례를 보자. 다수의 톨루엔 과다 사용 사례가 발생한 사업장이 있다. 작업환경측정에서는 톨루엔과 혼합유기화합물이 기준치를 넘지 않았으나 안전보건공단의 작업환경측정 신뢰성 평가에서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동안의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작업장 순회에서도 심각한 작업환경을 확인했다. 부분적인 요소들에 대한 권고만으로는 이 심각한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고 작업장 전체를 대상으로 공학적 대책이 필요했다. 문제는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이다. 대책을 디자인 할 수 있는 기술적 전문성이 필요하고, 사업주와 의사소통할 리더십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사업장과 장기간에 걸쳐 함께 할 수 있는 전망과 그에 맞는 조직체계가 필요하다.
이 사업장의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에 일개 근로자건강센터는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관련 기관들을 비롯해 주변의 조언과 지원을 물색하였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얻지 못했다. 이 사업장의 국소배기장치에 대한 평가와 개선안을 줄 수 있는 전문가나 업체만이라도 섭외하고 싶었지만 이 조차도 변변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사업장들이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요청들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안전보건 지원 체계는 찾기 어려웠다.
작은 사업장 안전보건이 실제로 작동하게 하려면
근로자건강센터를 비롯한 많은 민간위탁사업들의 활동방식은 검사, 상담, 교육이 중심이다. 다양한 방식 중 검진과 건강상담이 만병통치약처럼 과잉되어 있다. 사업을 '물량'화하여 드러내기에 좋은 방식이기 때문일텐데, 이런 식의 대책은 효과도 의문일 뿐만 아니라 문제의 중심에 접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방법이고 정의롭지도 못하다.
근래에 2010년대 유럽연합 각국의 작은사업장의 안전보건 접근 전략 사례를 담은 보고서1)를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유럽연합도 우리와 크게 다르진 않아서 글로벌 가치사슬의 하위에 위치한 작은 사업장들은 안전보건 상황이 양호하지 못했다. 분절화된 노동구조, 자원의 부족, 위험에 대한 낮은 인식, 저조한 노동자 참여, 위험을 불가피한 업무의 속성이라 여김 등.
하지만 유럽연합 국가들의 관련 기관들이 보인 방식은 분명 한국과 차이가 있다. 경제적, 기술적 제한들을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해법들을 창안하고, 해법을 작동시키기 위해 다양한 주체들(노조, 경영자 조직, 보험사, 공공서비스 등)을 참여시키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면에서 다르다.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공공기관이 담당하고, 얼굴을 맞대는 인간적 접촉을 강조하고 있었다.
예산 배정에 성공했고 사업물량을 달성했다면 이제 동력을 전달하고 핸들을 조작하여 차를 움직여야 한다. 민간위탁 구조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는 현장 안전보건 스탭들의 지위와 보상을 정상화해야 한다. 현장의 안전보건 전문가들이 사업장들과 만나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이 환류되어 예산과 사업기획 수립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작은 사업장 안전보건 정책과 사업의 의사결정이 형식적 절차를 갖추는 수준을 넘어서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공개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작은 사업장 안전보건이 소수의 전문가와 관료들만의 공회전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1) European Agency for Safety and Health at Work [Safety and healthh in micro and small enterprises is the EU: from policy to practice], 2018
(https://osha.europa.eu/en/publications/safety-and-health-micro-and-small-enterprises-eu-view-work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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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쓰신 최영철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후원회원이자 예방의학 전문의입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지 <일터> 4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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