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 왜 '글자 없는 비석' 세웠을까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 tvN |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지금까지도 평가가 엇갈리는 논란의 인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녀를 중국사에 손꼽히는 악녀 중 한 명으로, 누군가는 시대와 신분적 한계(평민 출신 여성)를 뛰어넘어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선구적인 여걸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4월 1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95회에서는 '측천무후! 당 제국의 재앙 혹은 위대한 여황제?'편을 통하여 측천무후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이성원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출연했다.
측천무후는 624년 중국 산시성에서 당나라의 개국공신인 아버지 무사확과 수나라 황족 출신이던 어머니 양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평민 출신이었던 아버지 무사확은 목재상으로 당 건국 과정에서 고조 이연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개국공신 가문의 금수저 딸로 태어난 측천무후의 본명은 '무조'였다. <구당서>에 따르면 그녀는 출생 때부터 관상이 기이하여 '용의 눈과 봉황의 목을 가진 복희의 상'이며 '용모가 비범하여 귀인 중에서도 존귀하다. 만일 여자라면 훗날에 제왕이 될 것'이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여성은 남성을 따르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던 당나라와 고대 사회의 남녀인식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예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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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는 어릴때부터 동시대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다양한 학문과 예체능을 섭렵하여 성장했다. 측천무후가 12세였던 635년, 아버지 무사확이 임종하면서 전처의 이복형제들과 불화를 빚게 된 측천무후는 친어머니와 두 자매와 함께 장안의 친척집으로 이주한다.
장안에서 이후 측천무후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된다. 14세가 되어 측천무후는 39세이던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라는 조서를 받게 된다. 당 태종은 측천무후의 뛰어난 미모를 보고 그녀에게 '무씨 성의 귀엽고 애교스러운 아가씨'라는 의미의 '무미'라는 이름을 하사하니, 바로 측천무후의 또다른 이름으로 유명해진 '무미랑'의 기원이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뛰어난 용모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황제의 총애를 얻지는 못했다. 이유는 바로 측천무후의 범상치 않은 성정 때문이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어느날 너무 사나워서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가 있어서 고민하는 태종에게 측천무후가 내놓은 해법이란, "채찍과 쇠몽둥이로 다스리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말의 목을 따버리면 된다"라는 섬뜩한 대답이었다고 한다.
불과 14세 소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잔인하고 대범한 대답은, 산전수전 다 겪은 태종으로서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한 12년 동안 한 번도 품계가 오르지 못 하며 홀대를 받았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긴 세월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을 열심히 익히며 자기개발의 기회로 삼았다. 당시는 태종이 '정관지치'로 불리우는 태평성대를 열던 시기라, 측천무후는 태종을 정치적 스승으로 삼아 유심히 지켜보며 통치술과 식견을 배웠다.
태종이 나이가 들며 병환으로 앓아눕게 되자 측천무후는 황제의 곁에서 병간호를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주 병문안을 온 황태자 이치(훗날의 당 고종) 만나게 된다. 당시 측천무후의 나이는 22세, 이치는 18세였다. 서로에게 운명적인 끌림을 느낀 두 사람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태종의 임종을 목전에 두고 금단의 사랑을 키워가게 된다. 온화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이치에게는, 아버지 태종이 꺼려했던 측천무후의 단호하고 강인한 성격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왔다.
태종이 죽고 이치가 새 황제인 고종으로 즉위했지만.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예법에 따라 황제의 자식을 못 낳은 후궁이었기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야 했다. 태종의 서거 1주기를 맞이하여 고종이 아버지의 제사를 위하여 측천무후가 있던 감업사을 방문하며 두 사람은 1년 만에 재회한다. 다시 불같은 사랑에 빠진 고종과 측천무후의 막장 로맨스 2막이 시작됐다.
아무리 황제인 고종이라도 아버지의 후궁이자 현재는 비구니가 된 측천무후를 궁궐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명분상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측천무후에게 생각지 못한 후원자가 등장한다. 놀랍게도 고종의 정실인 황후 왕씨가 측천무후의 입궁을 지지한 것.
왕황후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자식이 없던 왕황후는 황궁에서 고종의 총애를 받던 숙비 소씨와 연적관계에 있었다. 왕황후는 측천무후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녀를 끌어들여 소숙비를 견제하면서 그 사이에 어부지리를 누리려고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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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와 왕황후의 연대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왕황후의 지원속에 황궁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측천무후는 겸손한 모습으로 황후의 시중을 자처하며 고종과 왕황후 모두에게 환심을 샀다. 왕황후의 기대대로 고종은 소숙비를 멀리하고 측천무후가 모든 총애를 독차지했다.
고종은 측천무후를 정2품 소의에 봉하여 태종 시절보다 단숨에 품계가 급상승했다. 또한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 시절에 익힌 정치 지식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고종에게는 후궁을 넘어 '정치적 조언자'로까지 위상이 급상승했다.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측천무후는 오래가지 않아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측천무후는 놀랍게도 어린 영아였던 딸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뒤, 병문안을 온 왕황후의 죄로 뒤집어씌우며 모함했다. 분노한 고종은 왕황후를 폐위하고 측천무후를 대신 황후로 올리려고 했다.
라이벌을 모두 제거한 측천무후는 655년 마침내 당 제국의 황후 자리에 오른다. 평민인 목재상 아버지의 딸에서 후궁과 비구니를 거쳐 대제국의 황후 자리까지 오르는 인생역전의 순간이었다. 당시 측천무후의 나이는 32세로 황궁에 재입궁한 지 불과 2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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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는 황후의 자리에 오른뒤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대거 제거하는 대숙청을 단행했다. 먼저 별궁에 유폐되어 있던 경쟁자 왕황후와 소숙비를 온갖 잔혹한 고문 끝에 고통스럽게 처형했다. 일설에는 체념한 왕황후와 달리 소숙비는 죽어가면서도 "고양이와 쥐로 환생하여 네 목을 물어뜯을 것"이라며 측천무후를 끝까지 저주했고, 두려움을 느낀 측천무후는 이후로 궁궐에서 고양이를 절대 기르지 못 하게 했다고 한다.
이어 측천무후는 신하들을 부추겨 고종과 다른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이홍을 태자의 자리에 올렸다. 또한 자신의 황후 책봉에 반대하던 공신들을 잇달아 좌천시키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누명을 씌워 가족까지 몰살시켰다. 측천무후의 권세가 커지면서 황제와 대등한 정치적 동반자의 반열에 오르자 고종도 그녀를 견제하지 못했다.
660년 이후 고종이 젊은 나이에 중풍을 앓으며 건강이 악화되자 측천무후는 혼자서 정무를 볼 만큼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신당서'에는 "나라에 이성(두 명의 황제)이 있다"고 기록할 만큼 측천무후의 위세가 이미 황제를 능가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측천무후는 고종의 병세를 틈 타 남편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후궁들의 숫자를 대폭 줄였다.
여기까지보면 전형적인 막장드라마의 악녀같지만, 실제 역사에서 정치인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또 달라진다. 측천무후의 치세에 당 제국은 오히려 황권 강화로 인하여 정치가 안정되어 번영을 누렸다. 측천무후 시대에 당 제국의 확장된 영토는 건국 이후 최대에 이르렀고, 주요 실크로드까지 장악하여 동서문명의 교류가 활발해진 시기로 평가받는다.
또한 측천무후는 세금과 노역을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고 농업서를 발간-배포하며 민생을 돌보는 데 주력했다. 풍족한 곳간과 물가 안정으로 당나라의 경제는 나날이 번영했다. 물론 태종 치세부터 이어진 기반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를 계승한 측천무후의 탁월한 정치감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성과였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권력욕에 있어서 만큼은 혈육에게도 예외가 없을 만큼 한없이 비정하고 잔혹했다. 측천무후는 태자가 된 이홍이 24세가 되어 대신들의 지지를 받으며 실권자로 부상하자 이를 견제하여 친아들마저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신당서에 따르면 이홍이 소숙비가 남긴 두 딸을 불쌍히 여겨 황제에게 혼사를 건의했다가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사 의문사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형인 이홍 못지않게 똑똑하다는 평을 받았던 둘째 이현도 어머니 측천무후의 눈밖에 나며 자결해야 했다.
683년 고종이 승하한다. 측천무후의 셋째 아들 이철이 4대 중종에 오른다. 측천무후의 아들들은 모두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측천무후는 중중과 그 뒤를 이은 막내 예종마저도 잇달아 페위시키면서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위하여 친아들 넷을 모두 제거하는 비정한 어머니의 면모를 드러냈다.
측천무후의 공포정치와 신격화 작업
측천무후가 여황제 즉위에 대한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자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도 일어난다. 689년 서경업의 난이 벌어지며 본래 측천무후를 지지하던 서씨 집안의 공신이던 서경업은 측천무후가 황제와 황후를 죽인 악녀라고 비난하며 군사를 일으킨다. 측천무후는 서경업이 작성한 비난의 격문을 보고서도 오히려 웃음을 보였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서경업의 난을 진압한 뒤에도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가혹한 탄압을 실시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동궤'라는 투서함을 도입하여 밀고제를 실시했고 비밀감옥을 만들어 반대하는 이들을 구금하고 잔혹하게 고문했다. 측천무후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위협이 되는 정적들, 황실 족보에 올라있던 주요 가문들이 대거 멸족당했다.
측천무후는 본인이 황제가 될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종교와 미신을 이용하여 치밀한 신격화 작업을 펼쳤고 690년 9월, 마침내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여황제의 반열에 오른다. 당시 그녀의 나이 67세였고 정식 칭호는 측천금륜대성신황제였다.
또한 측천무후는 국호를 당에서 주나라로 바꾸었다. 자신의 성씨가 고대 주나라 황족의 후예라는 것을 내세워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측천무후는 과거제를 활용하여 형통이나 신분 대신 실력으로 인재를 등용했다. 측천 시대에 과거 시험으로 등용된 관리의 숫자는 630여명으로 고조-태종 시기를 합친 것보다도 2~3배가 많았다. 이들은 측천무후와 함께 제국의 황금기를 주도한 인재층을 형성하게 된다.
'신당서'에는 "관직에 맞지 않게 무능한 자가 있으면 모두 찾아내 삭탈하고, 대신 그 자리에는 정말로 현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자를 임명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측천무후에 비판적인 역사서와 학계에서도 그녀의 업적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또한 고종 시절인 652년에 약 385만 호였던 당나라의 가구수는 측천무후 집권기인 705년에는 약 600만 호로 증가한다. 비록 궁궐 안은 잔혹한 권력투쟁으로 살벌했을 지언정, 정치암투와 무관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살기 좋았던 시절로 기억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대에서는 측천무후의 치세가 당태종의 정관지치에 버금간다는 일부 학자들의 재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측천무후는 불로장생에 집착했고 남자 황제들이 여인인 후궁을 가까이 두듯이, 젊은 남자들을 가까이 두는 '남총'에 빠졌다. 도교의 양생술을 신봉했던 측천무후는 젊은 남자들과의 성생활이 젊음을 회복한다는 믿음이 강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설회의, 장씨 형제 등의 젊은 남성들을 총애했고 야사에는 하룻밤을 보낸 남자만 3000명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건강관리에 철저했던 측천무후는 70대의 나이에도 주변에서 그녀의 노쇠함을 느끼지 못 했을 정도라고.
하지만 남총은 결국 영원할 것 같던 측천무후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705년 측천무후가 노쇠한 틈을 타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전횡에 반발한 신하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장씨 형제를 제거하고 측천무후에게 양위를 요구한다.
대세가 기운 것을 파악한 측천무후는 자신이 페위한 아들 중종에게 황위를 계승하고 물러났다. 중종은 국호를 다시 당나라로 되돌리면서 여황제가 통한 15년간의 주나라 치세는 막을 내렸다.
반란 이후 궁궐에서 칩거하던 측천무후는 그해 겨울, 돌연 "왕황후와 소숙비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화를 입은 집안의 성씨와 관직을 모두 복권하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측천무후가 속죄의 의미도 있지만,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수 있는 권력갈등를 미리 없애려고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한 측천무후의 사후,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의외로 아무런 글귀도 새겨지지 않았다. 한때 황제까지 오른 그녀의 위상으로 봤을 때 관행적으로 업적이나 공덕이 기록되던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일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식까지 죽인 그녀의 악행이 기록될까봐 두려워했다는 설, 반대로 비석에 새기기에는 너무 업적이 많아서 비워두었다는 설까지 해석은 분분하다.
대문호 괴테는 '지혜로운 자라고 해서 과오마저 없다면 어리석은 자는 절망할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명성만큼이나 많은 업적도 과오도 동시에 남긴 인물이다. 전례가 드물게 세계 제국을 이끌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여황제로서, 정치인이자 인간으로서 그녀의 공과는 각각 구분해서 판단하는 것이 역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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