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고사리 실종'이 빈발하는 이유 [수산봉수 제주살이]

이봉수 2023. 4. 1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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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봉수 제주살이] 제주목사 이형상이 소개한 대표 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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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이봉수 기자]

거문고만 갖고 떠난 청백리에게 고사리란

'채소에는 고비와 고사리가 많은데 말뚝처럼 우뚝 선 것이 다발과 같다.'

제주목사 이형상이 1704년 쓴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고사리를 소개한 대목이다. '남환'은 '남쪽의 벼슬아치'란 뜻이니 제주목사인 자신이 제주를 대표하는 채소로 고사리를 꼽은 것이다. 고비 역시 고사리와 비슷한 양치식물로 고사리목에 속하고 고비나물로 식용한다.

<남환박물>은 제주도의 자연·역사·풍속·산물 등을 철저히 조사해서 쓴 '박물지'인데, '지초'(誌草), 곧 풀들을 기록한 대목은 한자로 고작 36자밖에 안 될 만큼 소략해 의아한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목사 이형상이 고사리를 제주 채소 가운데 맨 먼저 기술한 데는 춘궁기의 구황식물이라는 점과 함께 공직자로서 자세가 투영된 거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저서 몇 권과 백록담 구상나무 고사목으로 만든 거문고만 갖고 제주를 떠난 청백리로 유명한데, 고사리는 백이숙제의 고사와 연결된다. 두루 알다시피 백이와 숙제 형제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는 데 반대해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고사리비'를 반기는 사람들
 
▲ 채취하기 알맞은 고사리  고사리는 오른쪽 두 개처럼 아기 손 모양일 때 꺾어야 맛있다. 왼쪽에 있는 것처럼 가지가 많이 벌어진 것은 질기다.
ⓒ 이봉수
 
제주 사람들이 4월에 이슬처럼 내리는 비를 '고사리비'라 하여 반기는 이유는 고사리의 생육 조건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현무암과 화산토로 뒤덮인 제주는 농작물 소출이 빈약했는데 고사리는 꺾어서 말려 두면 일년 내내 쓸 수 있는 식재료가 되고 짭짤한 수익도 보장해준다.

고사리는 잎줄기가 세 갈래로 벌어져서 하루쯤 지나면 질기기 때문에 그 전에 채취해야 한다. 고사리가 올라올 때 아기 손처럼 생겼다 하여 '고사리손'은 어린아이 손을 비유하는 말이 됐다.

고사리는 '궐채'(蕨菜)라고도 불리는데 '고사리 궐'(蕨) 자 안에는 고사리가 올라올 때 참새가 발을 오므린 것처럼 보이는 상형문자가 들어있다. 그런데 제주 고사리는 진상품으로 바쳐져 임금이 '대궐에서 먹는 나물'이라는 뜻으로 '대궐 궐'(闕) 자를 써서 '궐채'라고도 한다.

제주 고사리는 살이 통통하면서도 연해 육개장과 비빔밥은 물론 고사리국이나 고사리잡채, 고사리지짐 등 다양한 향토음식으로 만들어 먹는다. 제주 고사리는 돼지고기와 함께 먹어야 제격이다.

고사리육개장은 돼지고기 뼈를 가마솥에 한참 우려내다가 고사리와 메밀가루를 넣어 걸쭉하게 끓여내는 일품 음식이다. 요리연구가 백종원은 흑돼지 삼겹살구이와 기름에 볶은 고사리를 함께 먹는 법을 방송으로 내보내 인기를 끌었다.

제사상에도 필수품 대접을 받는데 제주 민속학자이기도 한 김순이 시인은 <그리운 제주 풍경 100>에서 고사리를 제사상에 올리는 이유를 제주 할망의 말로 대신했다.

"고사린 아홉 손(筍)이렌 헌다. 보통 낭이나 풀덜은 손이 세 개이고. 싹이 나면 꺾어 불곡 꺾어 불곡 허민 세번 이상은 나질 못헤여. 힘이 다 헌 거주. 고사린 꺾어도 꺾어도 아홉 번 열 번을 악착같이 싹이 도나거든. 그치룩 자손이 악착같이 끊어지질 말게 해 줍센 조상님께 올리는 거."

제주민에게 뭣보다 중요한 고사리 채취

일조량과 강우량에 좌우되지만 4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 계속되는 고사리철에는 제주도민들도 고사리 꺾기에 나선다. 우리 부부가 키아오라 옆 도로 주변에서 잡초를 제거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이웃이 한마디 던졌다.

"고사리나 꺾으주. 무신거 햄서?"
    
'고사리나 꺾지, 뭐 하고 있냐'라는 뜻이다. 제주민에게 고사리 채취는 삶의 일부일 만큼 중요한 일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과거에는 제주도 중산간 지역 학교에서 아이들이 고사리 채취를 돕도록 '고사리방학'을 했다고 한다.

지난 9일 서명숙의 제주어교실 제5강은 '바당(바다)에서 쓰이는 제주어'를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그날 보조강사로 오기로 한 해녀가 고사리 채취를 이유로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주최측을 당황하게 했다. 고사리는 비가 온 다음 날 지천으로 올라오니 때를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고사리 꺾으러 제주 오는 관광객들

고사리를 꺾기 위해 일부러 제주에 오는 관광객도 많다. 지난해 4월 키아오라리조트에 숙박한 세 할머니는 관광보다 고사리 꺾는 재미로 해마다 제주에 온다고 했다. 그들은 삶아서 툇마루에 말린 고사리를 택배로 부치고 배낭에도 넣어갔는데 "숙박료가 빠졌다"며 즐거워했다.
 
▲ 고사리 말리기 투숙객이 가마솥에 삶은 고사리를 툇마루에 널어 놓았다.
ⓒ 이봉수
 
말린 제주 고사리는 현재 G마켓 등에서 600g 한 근에 9만 원을 호가해 소고기보다 비싸고 중국산에 견주면 3배쯤 몸값이 높다. 2000년대에는 북한산 고사리가 많이 수입됐으나 천안함 사건 이후 수입이 중단됐다.
 
▲ 고사리 삶기 고사리는 말이 먹지 않을 만큼 쓴맛을 내는 독성이 조금 있지만 살짝 삶으면 없어진다.
ⓒ 이봉수
중학교 동창이라는 중년 여성 셋은 4월 3일 관광 목적으로 와서 원래 이틀만 묵기로 했는데 이틀 더 연장했다. 리조트 바로 뒤 오름인 수산봉 언저리 '고사리밭'을 알려주었더니 고사리 꺾는 재미에 흠뻑 빠진 거였다. 그들은 이른 아침 고사리비가 내리는 날도 기어이 고사리를 꺾은 뒤에야 관광에 나섰다.
 
▲ 고사리 해장국  돼지고기 등뼈를 우려낸 가마솥에 고사리와 시레기를 넣고 뼈해장국을 만들고 있다.
ⓒ 이봉수
투숙객들이 지난해에는 숙소 안에서 고사리를 삶아 습기 차는 게 걱정됐는데 올해는 바비큐장에 화덕과 무쇠솥을 갖춰 놓고 거저 이용하게 했다. 2천평 정원에서 나오는 나뭇가지와 풀이 '처치곤란'했는데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제주 정착 직후인 지난해 봄에는 규정을 몰라 정원에 딸린 귤밭에서, 전지한 가지를 태우다 적발돼 과태료를 문 적이 있다. 과태료가 40만 원이었으니 제주도민이 되는 수업료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3년간 '고사리 실종' 113건
 
▲ 고사리 주차 성산읍과 서귀포시내를 중산간지역을 통해 잇는 1119번 도로 주변에 고사리를 채취하는 사람의 차들이 주차해 있다.
ⓒ 이봉수
 
관광객이 유의해야 할 일은 '고사리 실종'이다. 고사리는 곶자왈처럼 수목이 우거진 곳에 많은데 총총 나 있는 고사리를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는 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제주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제주에서 발생한 고사리철 길 잃음 사고는 113건으로 그중 70%가 4월에 집중됐다. 경찰청은 기상이 나쁠 때는 고사리 채취를 삼가고, 혼자 채취에 나서지 말고, 보조용 휴대폰 배터리를 갖고 다니라고 권한다.

제주에서도 길 잃음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중산간지대가 넓게 펼쳐지는 구좌지역으로 3년간 39건이나 됐다. 고사리가 많은 데다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형지물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구좌읍은 궁여지책 끝에 관내에 많이 서 있는 풍력발전기에 번호를 크게 써 붙여 길을 잃으면 신고하도록 했다.

올해 27회째를 맞는 '한라산 청정 고사리축제'는 오는 29~30일에 열린다. 그러나 고사리철은 4월 초에 시작돼 달포쯤 계속된다. 제주에는 19일 새벽에도 강풍이 잦아들더니 또 고사리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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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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