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98년생이 고시방에 들어와 제일 먼저 확인한 일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황은비 기자]
나는 고시생이다. 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처럼 몇 벌의 옷과 두 상자에 가득 채운 책을 가지고 고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시동에 입사하던 날, 짐을 내려놓고 방을 한 바퀴 빙 둘러보는데 강렬한 빨간색 안내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방문에 붙어 있던 소방 대피경로. 문구 밑에는 "불이야-" 하고 외친 뒤 빠르게 내달려야 할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 방에서 가장 가까운 비상구 위치를 확인한 뒤에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가 해당 비상구로 향했다. 비상구의 손잡이를 돌릴 수 있는지, 문이 열리는지, 소화기와 비상등은 어디에 비치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사는 동안 불은 안 났으면 좋겠는데... 불이 나면 비상구까지 뛸 수는 있으려나? 창문 쪽으로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 완강기는 있었나?'
▲ 극장에 와서도 가까운 비상구와 비상계단 도면을 머릿속에 열심히 새긴다. |
ⓒ elements.envato |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이렇게 하세요!'는 내 관심을 단번에 차지할 수 있는, 속된 말로 가장 훌륭한 어그로(관심을 끌고 분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터넷 게시판 따위에 자극적인 내용의 글을 올리거나 악의적인 행동을 하는 일)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으레 틀어주는 화재대피방송의 애청자라면 그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까. 와그작 와그작, 열심히 팝콘을 먹으며 가까운 비상구와 비상계단 도면을 머릿속에 열심히 새기고 있으면 그새 화장실을 갔다 온 친구가 누가 보면 영화 시작한 줄 알겠다며 웃은 적이 여러 번.
그 밖에도 지하철 스크린도어 안 비상대피 손잡이를 유심히 본다거나, 비상시 무전기 사용법을 알려주는 영상도 눈길 닿을 때마다 본다. 지난번 울릉도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는 다들 배 안 편의점 위치를 확인할 때 나 홀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배 구조와 외부로 통하는 문을 확인했더랬다.
각종 재난방송, 대피방송, 범죄프로파일링 프로그램 등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법을 머릿속으로 연상하기 시작한 건 10년 즈음 된 습관인 것 같다. MBTI 검사 결과 확신의 'N'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안다. 이 습관은 내 본성보다 경험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사건 1] 2014년 4월 16일
2014년 4월 나와 동급생들이 탄 배 세월호가 좌초됐다. 2교시 수학 선생님이, 3교시 사회 선생님이, 4교시 한문 선생님이 전달해준 조각 뉴스는 그날 저녁 다시 거대한 파도가 되어 육지에 있던 나를 덮쳤다.
그날은 하루종일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이었다. 전부 구조가 되었다가 그것이 몽땅 거짓이었다든가, '단 한 생명을 위해서라도 기도하자'는 선생님과 '안타깝지만 너희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하니 야자는 빼먹지 말라'는 선생님이 계셨다든가 하는.
그 일을 계기로 '국가의 본질'에 한층 진지해졌다. 정치외교학과를 진학하기로 마음먹었고, 내 상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국가가 도래할 때까지는 안전을 개인의 차원에서 관리함이 옳다 여겼다.
대학교 진학 후에도 모 대학 새내기 배움터에서 지붕이 내려앉아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나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끼임 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여상히 보도되었다.
임신 중절을 죄악시하고 저출생 문제를 염려하는 국가가 여전히 사람 목숨을 너무 쉽게 내어주고 있었다. 그동안의 삶이 열심히 살아낸 것이 아니라 간신히 생존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뭘 어쩔 수 있겠느냐는 생각과 함께 나도 다시 이상한 삶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함을 머지 않아 깨달았다.
▲ '159개의 우주가 사라진 159번의 밤과 낮 - 10.29 이태원 참사 발생 159일 시민추모대회'가 열리는 5일 오후 서울시청앞 합동분향소에서 한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 권우성 |
2022년 10월 이태원 한복판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참사 이후 진행된 강의에서는 교수님들의 참회가 이어졌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인재(人災)가 당신께서 일으킨 사고인 마냥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일깨우지 못했음에, 젊은 세대가 세월호 참사에 이어 또다른 국가적 재난을 경험하도록 방치하였음에, 자식을 잃은 아픔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또다시 같은 고통이 반복되도록 하였음에 학자로서, 어른으로서 그들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덧붙여 학생들의 정신적 외상을 걱정한 몇몇 교수님은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적극 권유했다.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향한 애도와 상처받은 우리 모두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노라 말했다.
그들의 발언 중, 상처받은 '우리 모두'라는 표현에 정곡이 찔렸다. 그날 그 장소에 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안도하기에 급급했던 내 옹졸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공공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나의 안전만 지키면 된다고 당당히 믿었던 태도가 부끄러웠다.
안전은 사유(私有)할 수 없는 것임을, 모두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 결국 나를 위한 일임을 너무 큰 비용을 치르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나의 안전만 지키면 된다고 당당히 믿었던 태도가 부끄러웠다. |
ⓒ elements.envato |
오늘의 내 삶은 먼저 별이 된 이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음을 기억한다. 밤마다 그들의 눈이 하늘에 떠오르면 짧은 눈맞춤으로 약속한다. 당신과 나의 삶이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겠노라고. 나를 위하듯 당신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리에 가닿기 위해 공부하겠노라고.
2023년, 여전히 낯선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을 상상하고 대처법을 구상한다.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개 시뮬레이션 해 본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위험해 보이는 장치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보이는 경우 관할 부서나 책임자에게 의견을 전달한다는 것.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중 CPR과 완강기 사용법을 소개할 구석이 생기면 슬그머니 대화 소재로 끼워넣는다는 것.
"아, 그런데 완강기 사용법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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