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K-우먼]“을의 디딤돌…금감원 첫 여성 부원장에서 사모펀드 분쟁 해결사로”
을을 위한 일 늘 고민…자살보험금 분쟁 조정에서 소비자 도와
편집자주 - 아시아경제는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을 '파워 K-우먼'으로 선정해 오는 10월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2023 여성리더스포럼’을 통해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들은 성별·인종·장애·가난 등 장벽에 굴하지 않고 경계를 부수거나 뛰어넘어 새롭고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한 여성 리더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친 세상에 위로를 주고, 누군가의 롤모델로 자리 잡아 공동체가 나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차별에 위축되거나 경계에 갇히지 않고 맞서 싸운 사람들을 파워 K-우먼 후보로 뽑아 매주 소개합니다.
"걸림돌도 디딤돌이 된다." 김은경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부원장)이 카카오톡 프로필에 항상 올려두는 문구다. 그는 그간 겪었던 인생의 역경이 '축복'이었다고 표현했다. 2020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던 김 전 처장은 첫 여성 금감원 부원장으로 발탁됐다. 주류 학자들을 모두 제치고 그가 깜짝 발탁된 것은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교수 시절 보험사들이 고의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된 자살보험금 소송에서 소비자 편에서 대법원의 지급 판결까지 이끌어냈다. 금감원에 입성해서는 헤리티지 펀드 분쟁 조정에서 해결사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각종 압박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원칙'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금감원 보고 문화의 경계 무너트려
평소 스커트를 즐겨 입는 그는 금감원에 근무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바지를 입었다. 그는 "금감원에서 처음 출근했을 때 육중한 위엄이 느껴졌다. 금감원에서 나의 존재가 여성으로 비춰지면 어쩌나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의 전문 분야는 법학이었고 게다가 금소처의 민원은 절반 이상이 보험 관련이기 때문에 업무상 적응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다만 교수로 자유롭게 지내다가 경직된 조직에 적응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김 전 처장은 금감원의 보고 문화도 바꿔놨다. 그는 "초반에 보고서를 읽다가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조사역에게 직접 전화했다"라며 "'김은경인데요' 했더니 상대방에서 한참 아무말이 없었다. 임원이 직접 전화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보고서 작성자와 '직거래'로 소통했다. 그는 "이후 보고서를 작성한 당사자가 보고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경계를 무너트리니 소통이 빨리되고 유연함이 있었다"며 "또 임원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를 주는 것은 직원들에게 자긍심이나 책임감도 심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헤리티지 펀드 전액 반환 이끈 '해결사'
김 전 처장은 5000억원에 육박하는 환매 중단 사태를 일으킨 독일 헤리티지 펀드의 분쟁조정을 이끈 '해결사'다. 금감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신한·NH투자증권 등 6개 판매사가 헤리티지 펀드의 투자원금 전액을 고객에게 반환해야한다는 조정 결정을 내렸다. 김 전 처장은 "의사봉이 3번 땅땅땅 내리쳐지는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헤리티지 펀드는 2017년 4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독일 '기념물보존등재건물'을 주거용 건물 등으로 리모델링하는 사업에 브리지론 형태로 대출을 실행하는 상품이다. 싱가포르의 반자란자산운용이 대출펀드를 조성하고 신한금융투자 등 국내 금융사 6곳이 이를 기초자산으로 한 파생결합증권(DLS)을 발행해 총 4835억원치를 팔았다.
전액 반환 결정에는 김 전 처장과 금감원 직원들의 피땀이 있었다. 이들은 헤리티지 펀드가 팔릴 시점에 독일 시행사의 신용 상태가 위험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독일에서 유학한 김 전 처장은 독일어로 구글링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는 구글링만으로 독일 의회의 공문서를 찾아냈다. 그는 당시 찾았던 문서를 기자에게 보여주며 "이걸 찾았을 때 정말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그와 금감원 직원들은 이 문서를 시작으로 독일 경제지의 기사, 브레멘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파산관재인과 줌 회의까지 한 단계식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독일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었던 영국 소비자단체까지 접촉해 자료를 받아냈다. 이후 독일, 영국, 싱가포르 등 각국 금융당국에 메일을 하나하나 보내면서 살라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헤리티지 펀드 관련 분쟁대상 회사 중 하나는 계속 독일 시행사에 2개월마다 재무제표를 요청한 것을 알게됐고, 계속 자료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1000여억원을 더 판매한 것을 발견했다"며 "선관주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을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 늘 고민"
김 전 처장은 금감원 입성 전에는 '을의 디딤돌'을 자처하며 살아왔다. 그가 중학생 때 교사였던 아버지가 긴급조치 9호 위반자가 되는 사건이 생겼다. 이후 파면무효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한 판사가 화해를 끌어내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재판이 끝난 후 알고보니 판사는 아버지의 옛 제자였다. 김 전 처장은 이를 계기로 법학도의 길을 걷게됐다. 그는 "을이 항상 중요했고, 을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면서 '을'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실에는 아직도 자살보험금 분쟁 관련 서류가 빼곡히 쌓여있다. 그는 보험사들이 자살 보험금 특약 가입자들에게 보험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하도록 이끈 대법원 판결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분쟁은 재해특약에도 자살보험금 관련 문구가 있다는 데서 시작됐다. 생명보험사들은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약관을 작성하면서 실수로 포함된 것이라며 자살을 재해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입자들은 약관이 잘못됐더라도 작성자인 보험사의 잘못이기 때문에 약관대로 보험금을 줘야 한다고 맞섰다.
비슷한 류의 해외 논문이 있는지 살펴보던 김 전 처장은 직접 실증조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제자와 함께 발로 뛰며 사회 각계각층 1022명에게 직접 설문지를 돌렸다. 그는 "보험사 측에서는 평균적 소비자라면 이 내용(약관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라며 무효라고 주장했다"며 "정말 유의미했던 건 설문에 응했던 상법 교수와 초졸 78세 노인의 답이 같았다는 점이다. 평균적 소비자는 허울 좋은 말이고 추상적인 말이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업자가 소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을의 입장에서 디딤돌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사퇴 압박에도 임기 마쳐…무엇이든 잘 할 수 있는 용기 얻어"
그는 임기를 끝까지 마친 첫 금소처장이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정권이 바뀌면 금감원 임원들은 '퇴직 압박'에 시달린다. 그가 사표 압박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마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른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겁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금감원의 업무는 임기 보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수장은 내부 사람이거나 금감원에서 일해 본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 이복현 금감원장은 검찰 출신이다. 그는 "금감원 조직의 단점은 틀 안에서만 사고하고 그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는 것"이라며 "금감원의 수장은 내부 구성원을 기본으로 하고, 외부 인적자원도 활용해 시너지 효과가 나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간 김 전 처장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누가 무슨 일을 부여하든지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교수인 줄만 알았는데 조직에서도 업무를 이해하고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라며 "앞으로도 이 범주에선 사회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은경 전 금소처장은 누구?
금융감독원 첫 여성 부원장을 지냈다. 무학여고, 한국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한 후 독일 만하임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보험법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금감원 분쟁조정위원, 제재심의위원 등 금융당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자살보험금 분쟁 조정에서 소비자 편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금감원에 입성한 후에는 사모펀드 분쟁 해결에 앞장섰다. 지난 3월 3년간의 임기를 마쳤다. 임기를 다 채운 첫 금소처장이다.
부애리 기자 aeri34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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