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세력과의 불편하지만 무난한 동거
[김종성 기자]
▲ SBS <꽃선비 열애사>의 한 장면. |
ⓒ SBS |
조선시대 하숙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SBS 사극 <꽃선비 열애사>는 하숙집이 아닌 왕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역모를 일으켜 세자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이창(현우 분)과, 죽은 세자의 적자인 강산(려운 분), 죽은 세자의 서자인 정유하(정건주 분)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을 다루고 있다.
본래 이름이 이설인 강산은 예비 후계자인 세손 시절에 쿠데타를 당해 어린 나이에 떠돌다니며 숨어 살았다. 3월 20일 방영된 제1회에서는 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어린 세손이 쿠데타를 일으킨 삼촌을 피해 대갓집 마당의 개집으로 숨어드는 장면을 보여줬다. 이 개집은 그가 훗날 성장한 뒤 다시 찾게 될 하숙집의 개집이었다.
▲ SBS <꽃선비 열애사>의 한 장면. |
ⓒ SBS |
이달 17일 제9회에서는 임금을 경호하는 내금위에 배치된 강산이 대궐에서 이창과 조우하는 장면이 있었다. 방영 31분경에 나온 이 장면에서 이창은 강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임금 앞에서 치러지는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 때, 이창은 발군의 기량을 선보이는 강산을 유심히 관찰했었다. 그런 강산이 내금위 장교가 되어 자기 앞에 나타나자 뚫어져라 쳐다보게 됐던 것이다.
강산을 응시하던 이창이 "어쩐지 오래 본 듯 낯이 익단 말이지"라고 말하자, 그 순간 강산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칼을 쥔 쪽었다. 그러면서 강산은 이창을 응시했다. 강산을 지켜보던 내금위장 김환(주석태 분)이 주의를 준 뒤에야 강산은 손목의 힘도 풀고 시선도 아래로 깔게 됐다.
이 드라마 속의 상황과는 당연히 많이 다르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쪽과 쿠데타를 당한 쪽이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풍경이 우리 현대사에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박정희와 윤보선의 사례다.
'권력을 가진 쪽'과 '권위를 가진 쪽'의 공존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일종의 무신정권인 이 기구는 이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됐다. 의원내각제하의 장면 총리와 함께 5·16 쿠데타를 당한 윤보선 대통령은 1962년 3월 22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 박정희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됐고, 1년 9개월 뒤인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를 정식 대통령으로 하는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고려 무신정권 때는 실질적으로 두 개의 정부가 존재했다. 임금이 이끄는 기존의 조정과 더불어 무신들의 의사결정기구인 중방이나 도방 같은 곳이 공존했다.
일본의 가마쿠라막부(1185-1333), 무로마치막부(1336-1573), 도쿠가와막부(1603-1868) 때는 일왕(천황)의 조정과 무사들의 막부가 공존했다. 무사들이 최고 권력은 장악했지만 최고 권위까지는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권력을 가진 쪽'과 '권위를 가진 쪽'이 부득이 공존하게 됐다.
1961년 5월 16일부터 1962년 3월 22일까지의 10개월간도 그런 공존의 기간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상황을 수습한 뒤 군대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곧바로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쿠데타 세력의 한계로 인해 윤보선은 상당기간 허울뿐이나마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의 지위는 1961년 6월 6일 시행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해 현저한 제약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의원내각제하의 대통령보다도 훨씬 못한 지위에 놓이게 됐다.
1960년에 개정된 헌법의 제69조는 대통령에게 국무총리 지명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가 민의원의 동의를 받아 총리가 되도록 규정했다. 또 총리가 국무위원을 임명하고 해임하는 것을 대통령이 확인하도록 규정했다. 대통령의 확인에 의해 총리의 장관 임면권이 최종 효력을 발휘하도록 해놓은 것이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한층 더 축소시켰다. 이 법은 제2조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기관"이라고 선언한 뒤, 제14조에서 최고회의가 내각수반에 대한 임명권을 갖도록 했다. 또 내각수반의 각료 임명에 대한 승인권도 갖도록 규정했다. 이로써 대통령은 내각 구성에 대해 형식적으로라도 관여할 여지가 없게 됐다.
이 법 제5조는 최고회의 위원들이 최고회의 의장을 선출한다고 규정했다. 최고회의 의장 선출에 대통령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쿠데타 세력이 독자적으로 선출하는 최고회의 의장이 실질적인 최고 권력을 행사하도록 해놓는 한편, 대통령 밑의 내각 각료를 임명하는 일에도 최고회의가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놓았다. '무신정권'이 '임금의 조정'을 극도로 억압했던 것이다.
박정희에게 부담을 준 윤보선
1962년에 대통령직을 하야한 윤보선은 얼마 안 있어 박정희의 최대 경쟁자로 부각됐다. 윤보선은 자신이 하야한 뒤 치러진 두 차례 대선에서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63년 대선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가 46.64%, 2위인 민정당의 윤보선이 45.09%를 기록했다. 1967년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박정희가 51.44%, 2위인 신민당의 윤보선이 40.93%였다. 연속된 두 차례 대선이 두 사람의 양강 구도로 전개됐던 것이다.
윤보선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박정희에게 부담을 줬다. 그는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부각시켜 빨갱이 이미지를 씌웠다. 2년 뒤 박정희는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강행해 친일 이미지도 얻게 됐다. 윤보선은 박정희가 갖게 된 두 개의 콤플렉스 중 하나를 찾아내 박정희를 곤혹스럽게 만든 주역이다.
윤보선은 '박정희 위'가 아니라 '박정희 밑'에서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이래저래 억눌렸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그런 상황을 입법화한 법률이었다. 그 시기에 느꼈을 불만이 1963년 이후 윤보선의 행보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반공이념을 표방하는 박정희에게 하필이면 빨갱이 이미지를 씌운 것은 박정희와의 투쟁에 대한 윤보선의 집념을 보여준다.
그런 점들을 보면 박정희와의 동거가 윤보선에게 무척 불편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동거 기간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불편한 동거'이기도 하지만 '무난한 동거'이기도 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쿠데타를 일으킨 쪽과 당한 쪽의 관계는 <꽃선비 열애사> 제9회에 묘사된 것처럼 불편하고 불안한 법이지만, 박정희와 윤보선의 동거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최고 권력을 행사했지만, 그 권력 행사에 형식적으로나마 합법성을 부여해준 것은 대통령 윤보선이었다. 박정희에게 중장과 대장 계급장을 달아준 사람도 다름 아닌 윤보선이었다.
1989년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윤보선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 제12편은 1961년 11월 1일에 있은 박정희의 대장 승진에 관한 윤보선의 소회를 들려준다. 박정희가 청와대를 찾아와 "미국을 방문하기 앞서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해야겠습니다"라며 "그래야 대미관계에 권위가 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일을 떠올리면서 윤보선은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기 스스로 이미 대장 진급을 결정해놓고 달아달라고 하는데 별 수 없었다. 진급시킬 수 없다고 한들 그대로 따를 사람들도 아니었다. 사성 장군 계급장을 달아줄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하는 듯하면서도 윤보선은 박정희의 요구를 승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는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는 표현이었다.
윤보선은 하야하는 그 순간에도 박정희에게 힘을 실어줬다. 1962년 3월 22일자 <조선일보> 기사 '윤 대통령의 사임 성명 전문'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원래 덕이 없는 이 사람이 국가원수직에 있었던 1년 8개월 동안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나는 그 책임을 느끼는 바입니다"라고 한 뒤 "작년 5월에 군사혁명이 발생하여", "군사혁명 후 나는 한때" 같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5·16의 합법성을 은근히 강조했다.
또 4·19와 5·16를 나란히 언급하면서 "두 차례의 혁명"이란 표현도 썼다. "모든 질서가 안정되고 모든 계획은 확립되고 국제적인 신망이 날로 증진되어 가는 이 나라의 현실에서 나는 안심하고 물러갈 결심이 섰습니다"라는 말도 했다. 하야성명 전날인 3월 21일에 박정희-윤보선 단독회담이 있었다는 3월 22일자 <경향신문> 톱기사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하야성명 역시 양측의 교감하에 이뤄졌으리라 볼 수 있다.
회고록에서 윤보선은 "나의 숙명적인 들러리 역할에 스스로 씁쓸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씁쓸해 하기는 했지만 그는 박정희의 들러리 역할을 충실히 이어나갔다.
박정희와의 동거 기간은 박정희가 민선 대통령으로 변신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어준 동시에, 윤보선 자신이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어 1963년과 1967년에 맹활약하게 되는 발판을 제공했다. 윤보선 본인에게도 정치적 이익이 없지 않은 기간이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윤보선과 박정희의 동거는 불편한 동거인 측면도 있지만, 무난한 동거인 측면도 강하다고 평할 수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가는 곳이 곧 길이다, 아이브의 당찬 행보
- "대표님에게 옷 한 벌..." 우승 향한 '피크타임' TOP6의 진심
- '청담동 며느리'의 반란, '닥터 차정숙'에 실망하긴 이르다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팀, 월드투어 첫 순서로 한국 택한 이유
- 단골 손님마저 잃은 방앗간, 강형욱 솔루션에 '웃음'
- 남편과 헤어질 결심한 여자, '병맛' 코미디의 진수
- 기다림은 끝났다, '최강야구' 드디어 시작된 개막전
- 성룡에 뒤지지 않는 액션... 양자경은 이런 배우였다
- '모범택시2' 이제훈 "마지막일 수 있다는 심정으로... 다 불태웠다"
- 홈리스 선수들의 활약... 무난했던 '드림'이 준비한 한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