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명 죽게 해도 풀려날 판? '사형 안되는 사형수'가 부른 모순

박태인 2023. 4. 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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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원주시 여호와의 증인 예배당을 방화해 15명을 숨지게 한 원언식씨의 범죄 사실을 보도한 신문의 모습. 중앙포토

사형제에 있어 한국은 모순적인 국가다. 첫 번째 모순은 형이 존재해도 집행은 안 한다는 것이다. 1997년 12월 30일 김영삼 정부의 23명 사형 집행이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 모순은 사형제에 대한 국내외 정부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공개변론에서 법무부 측은 “유족의 울분을 무시할 수 없다”며 사형제 존치를 주장했다. 반면, 외교부는 5개월 뒤인 12월 국제연합(UN)의 ‘사형제 모라토리엄’ 결의안에 찬성했다.

국제사회는 이런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이라 규정해왔다. 마지막 사형 집행 이후 25년 4개월간 큰 불편함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모순의 여파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모든 형(刑)엔 공소시효와 마찬가지로 법적 안정성을 고려한 집행시효가 있다.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은 않다 보니 시효(30년)가 만료되는 사형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원언식씨가 그 첫 번째 경우다. 그는 1992년 “아내를 내놓으라”며 여호와의 증인 예배당에 불을 질러 15명을 숨지게 했다. 1993년 11월 23일 사형확정 판결을 받은 최장기 복역 사형수로, 올해 11월 형의 집행시효가 만료된다. 원씨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1월 전에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원씨를 아예 풀어줘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법무부가 뒤늦게 사형 집행 시효를 폐지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당내 경쟁자였던 홍준표 현 대구시장과 사형제에 관한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대선후보 2차 전당대회에 참석했던 윤 대통령과 홍 시장의 모습. 뉴시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도 이를 보고받았다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법적 미비가 발생한 것으로 보여 개정안 통과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부 법안 심사의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은 촉박해 국민의힘 안병길 의원이 17일 의원 입법으로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여·야간 쟁점이 없어 통과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법조계와 시민사회 일각에선 이 역시 ‘땜질식 처방’에 머무른다고 지적한다. 사형제가 존재하나 집행하지 않는 모순의 근원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헌법재판관은 “사실상 법을 희화화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번 기회에 사형제 자체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사형제에 대해 공개적인 입장을 밝히진 않았다. 대선 기간 윤 대통령의 견해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있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9월 당내 경쟁자였던 홍준표 현 대구시장과 ‘흉악범 살해’ 논쟁을 벌였다. 홍 시장이 영아 강간 살해범에 대해 “사형시킬 것”이라고 하자 윤 대통령은 “행정 수반인 대통령이 형사 처벌과 관련해 언급하는 것이 좀 두테르테식”이라고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그 뒤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사형제와 관련해 “강력한 처벌이 범죄 예방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여러 분석 결과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리아 카스티요 페르난데즈 주한 유럽연합 대사가 지난해 7월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사형' 부분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의 공개 변론을 방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형제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의 고심이 읽히는 지점도 있다. 윤석열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사형제에 대해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지난해 7월 헌재 변론에선 존치론을 내세웠지만, 5개월 뒤인 12월 UN 총회에선 ‘사형제 모라토리엄’에 찬성표를 던졌다. 국내 사형수 문제를 연구해 온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실장은 “사형제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딜레마적 상황이 드러난 장면”이라고 지적했다. 국내에선 사형제 찬성 여론 (2022년 7월 갤럽 기준 찬성 69%, 반대 23%)이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선 정반대로 사형제 자체에 부정적인 국가가 다수다. 유럽연합(EU)의 경우 가입국 기준에 ‘사형제 폐지’가 들어갈 정도다. 김 실장은 “한국이 만약 사형을 집행한다면 외교적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여론이 좋지 않다 보니 사형제에 대한 국내 논의는 뒷순위로 밀리기 일쑤였다. 21대 국회에서 사형제 폐지 관련 법안은 2년 전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이 유일하다. 발의만 됐을 뿐 단 한 번의 토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사형제와 관련한 시선은 헌재에 쏠려왔다. 지난해 공개 변론이 열린 헌재의 사형제 심리는 1996년(합헌 7, 위헌 2)과 2010년(합헌 5, 위헌 4)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시대가 변하며 위헌 의견이 늘어난 상황이다.

사형제를 연구하며 원언식씨와 서신 교류를 해왔던 이덕인 부산과학기술대 교수는 “이번 시효 논란에서 드러났듯 한국 사회는 지난 30여년간 사형제에 대한 논의를 방치해왔다”며 “땜질 처방처럼 문제를 넘기기보단, 사형제 존폐와 가석방 없는 종신형 등 대체 입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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