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며
선친이 세상을 떠난 지 열다섯 해가 됐다. 얼마 전 따스한 오후에 흙을 붓고 떼를 입힌 후 다져 밟아 유택을 정비했다. 평일 봄날 오후 동생과 함께 무덤가에 앉아 내려다본 공원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빗질하듯 내리는 햇살, 막 수줍게 봉오리를 연 봄꽃들, 가볍게 살랑이며 속삭이는 바람만 가득하다. 때때로 새들이 높고 깊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고요는 우리에게 가만히 말을 건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때 비로소 들리는 소리”로 귓가를 가득 채운다. 아늑함과 아득함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따스한 공기는 더욱더 풍성하게 피부에 느껴지고, 추억이 뭉텅뭉텅 구름처럼 머릿속에서 일어선다. 그러고 보면 침묵은 고요한 말이다. 영혼의 언어는 침묵 속에서만 비로소 날개를 펴고 소곤소곤 속삭인다.
“우리 식구들은 서로 쥐어짜는 어조로 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화법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자리’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는 말했다. 이 고백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와 아들은 대부분 인생의 어느 갈림길부터 말이 잘 통하지 않고, 대화가 쉽게 다툼으로 번져서 따로 둘만 있기 어색하고 무서워진다.
에르노와 마찬가지로 문학 공부는 아버지와 나 사이를 끊어놓았다. 거칠고 노골적이고 악쓰지 않으면, 존재를 표현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삶이 내 안에서 돌연 낯설어졌다. 그 생생한 언어, 그 건강한 삶이 어딘지 멀어졌다. 다행히(?) 아버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 후 지친 몸으로 잠들기 일쑤였고, 나 역시 밤낮이 뒤바뀐 채 더욱 문학과 철학을 파고들었다. 힘겨운 노동으로 지친 아버지 눈엔 쓸모없는 공부에 매달리는 아들이 철부지처럼 느껴졌을 테다.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때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던 아버지의 황당하고 분노한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응원받기까지 기대하진 않았으나 아직 어린 나로선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취직해 어려운 집안 살림에 손을 보태기는커녕 등골을 빠는 흡충으로 살겠다는 말이었으니 아버지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살아생전 아버지가 단 한 번 나한테 의견을 청한 적이 있다. 동료들 권유로 노조 대의원에 나가려고 하는 와중에 회사에서 이런저런 특전을 제시하면서 미끼를 던졌을 때였다. 의리와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버지는 평생 처음 진지하게 아들 생각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돈은 내가 벌 테니, 집안 걱정 말고 의리를 지키세요’라고 했으면 얼마나 듬직했을까 싶다. 무심히 남의 말 하듯 ‘당연히 대의원에 나가셔야죠’라고 이야기한 걸 후회한다. 아버지는 먹물에 불과한 내 말을 따르지 않았고,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 약간 수입이 늘어나는 삶을 택했다. 당시 난 어리석게도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지금은 그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한다.
위대한 아들을 두었으면서도 성서에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처럼 아버지 역시 진짜 속마음을 단 한 번도 내비치지 못하고 살았던 듯하다. 신학자들은 요셉의 침묵을 전적인 헌신의 표시로 해독한다. 세상은 너무나 각박하고 생계는 너무나 어려웠기에, 진짜 하고픈 말을 아마도 단 한 차례도 하지 못하고 살았을 아버지의 삶은 가족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제야 간신히 아버지의 삶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좋은 음식을 나누면서 정답게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한데, 아버지는 이미 곁에 없다.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흐르고 깨달음은 한없이 뒤늦게 오니 슬퍼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봄날 무덤가에 침묵의 속삭임이 온 천지에 가득하고, 추억은 방울방울 무수히 떠다닌다. 따뜻한 햇볕 아래 누워 계실 아버지를, 그 힘겨웠던 삶을 애도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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