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 야구 못해 졌다고? 진짜 이유 알려주는 오타니의 '책' [이태일이 소리내다]
지난 3월 10일 나는 일본 도쿄돔에 있었다. 그 날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이 열린 그 곳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일상에서 가장 뜨거운 ‘금요일 오후 7시’ 경기였다. 낮 12시가 좀 지난 시간부터 팬이 모였고 금방 4만5000명 수용의 관중석이 꽉 찼다. 오후 6시 55분쯤 시구를 위해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마운드에 올랐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유세 중 피살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탓인지 경호가 삼엄했다. 기시다 총리는 웃으며 시구했고 쿠리야마 히데키 감독이 마중을 나와 그 공에 사인을 남겼다. 1루쪽 일본 선수단, 그 뒤 관중석 팬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그 시간 도쿄돔은 스포츠로서 야구 한일전과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가 한 자리에서 보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3루쪽 한국 선수단은 전날 호주에게 진 탓에 부담스러운 기운이 역력했다. 당시 어떤 소문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이 도쿄돔에 와서 공동 시구를 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외교적 이슈 탓인지 소문은 그냥 소문으로 남았다. 윤 대통령은 약 20일 뒤 한국 프로야구 개막일에 대구에서 시구했다.
한일전답게 “가위 바위 보도 질 수 없다”는 선수들의 라이벌 의식은 비장했지만 수준 차이는 확연했다. 한국은 그날 4대13으로 크게 졌다. 경기가 끝난 뒤 ‘도쿄 참사’ ‘굴욕’ 등 처참한 표현이 나왔다. 일본은 미국과의 결승에서 마운드의 오타니 쇼헤이가 최고 타자 마이크 트라웃을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는, ‘만화 보다 더 만화 같은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며 ‘끝내’ 우승했다. WBC는 야구에 진심인 그들이 14년 만에 세계정상(WBC 우승)을 되찾아오는 여정의 완성이었다.
반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한때 세계야구 톱 클래스로 꼽혔던 한국은 8강부터는 구경만 하는 신세가 됐다. 한국은 2013년부터 3회 연속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컨디션 조절 실패부터 투수력의 열세, 기본기의 중요성, 저변의 차이 등. 대부분 지고 나면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반복됐다.
야구의 차이도 사람의 차이다
야구의 차이도 결국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차이다. 야구에서 상대적으로 열세라면, 또는 수준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야구라는 분야를 이루는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나는 그 차이가 기능보다 소양, 지식,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야구의 수준을 야구장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한다. 공의 빠르기나 타구의 거리, 1루까지의 스피드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최상위 레벨로 가면 그 수치는 (물론 차이가 있지만) 비슷해진다. 그 레벨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충분히 느껴지는 가치들이다. 상상력, 창의력, 판단력, 결단력, 리더십, 책임감, 배려심 같은 덕목이다.
이번 대회 MVP 오타니의 활약에 주목한 팬들은 그의 타격과 투구는 물론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호감을 느끼고 감탄했다. 8강에 오른 뒤 한국, 대만 야구를 배려하는 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팀 체코’의 모자를 쓰고 그들을 지지한 것, 결승전을 앞두고 일본 선수단에게 “오늘은 (미국 선수에 대한) 동경을 버리자”라고 승부사다운 코멘트를 한 것 등에서 ‘야구선수 이전에 사람으로서 소양의 깊이’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오타니가 어떻게 성장해서 그런 품성과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도 뒤따랐다. 그의 고교 시절 만다라트가 다시 회자되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검소한 성품과 독서 습관 등이 인정받았다. 특히 라커룸 발언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듣는 사람의 언어에 맞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오타니는 분명 한국 정서로는 ‘운동선수로서 보기 힘든’ 리터러시(Literacy, 文解力)를 가졌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어른들의 책임’과 ‘사회적 배경’을 짚어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그 성장 시대에 스포츠를 철저히 결과 위주의 국위선양 덕목, 국제 경쟁력의 척도로 삼았다. 그런 어른들에 의해 학생 선수들이 인간적 소양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성장한 선수들이 다시 어른이 됐고 이른바 ‘지도자’가 됐다. 그렇게 대물림하며 학생 선수를 가르쳤다. 그들도 대부분 스포츠를 기능적으로 배웠고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 기성세대로서, 그동안 야구선수에게 그들이 성장할 청년기에 인간적 그릇의 크기를 작게 강요한 책임을 갖는다. 위 내용에 대해 많은 관계자가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국가적 스포츠 위상이 추락할 것이라고 경고할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런 가치를 위해 개인이 균형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환경을 강요하는 사회가, 더 비정상이라고 여긴다.
조심스럽지만 아래 사진은 NC 다이노스 사장으로서 일한 후반 4시즌(2014~2017년) 동안의 정규시즌 승리 숫자(왼쪽)와 그 당시 구단이 강조했던 세 가지 가치(오른쪽)다.
NC는 4년 동안 정규시즌 316승으로 10개팀 가운데 가장 많이 이겼다. 눈에 보이는 숫자를 얻었지만 원했던 가치는 충분히 얻지 못했다. 그동안 상대적 경쟁 위주의 숫자 중심 문화는 더 중요한 절대적 발전을 위한 그 보이지 않는 가치를 오히려 함몰시킨다는 교훈을 얻었다.
한국팀 탈락했지만 8강·4강·결승전 현장 보고서 필요
징비록과 서유견문은 실패로부터 배우고, 선진문화로부터 배우자는 책이다. WBC 1라운드 탈락 이후, 나는 한국야구 관계자가 8강이 모이는 마이애미에 가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누가 갔으며, 어떤 리포트가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 경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징비록은 지난 잘못을 경계하여 후환을 막는 취지로 임진왜란의 아픔을 뼈를 찌르며 쓴 국보다. 서유견문 역시 비슷하다. 야구 선진국은 우리가 아니다. 규모는 차치하고 산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미국, 일본이 앞선다. 그걸 알자는 거다. 배우고 따라 하는 건 그 다음이다.
오타니는 학교에서만 배웠을까. 그는 인터뷰 때 “요즘 내가 읽은 책에서는…”이라는 식의 인용을 자주 한다. 일본, 미국 서점에 가면 그 수많은 야구책에 놀란다. 스스로 지식을 얻고 쌓을 수 있는 책이라는 ‘도구’가 충분한 환경이다. 우리 사회는 야구를, 스포츠를 문화적 사회적 지식의 분야로 여기지 않는다. 경기하는 사람들의 전문적 영역으로 본다. 그렇다면 야구계가 그런 시도를 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현장의 관계자, 지도자(나는 이 표현을 어색하게 여긴다)는 기술을 강조하고 ‘야구인’이라는 불명확한 정체성을 강조해 기득권 우호적 구조를 더 강하게 만든다. 그렇게 야구를 배우는 학생은 책이나 다른 장치를 통해 소양을 기를 수 있는 환경에 가까이 가기 힘들다. 우리 야구에선 시속 160km를 던지는 능력보다 그런 지식 소양을 기를 수 있는 교육·문화적 환경이 더 절실하다.
우리의 스포츠 리터러시, 그 문화를 위하여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 즉 리터러시는 그 분야의 문화를 만들고, 결국 사람의 차이를 만든다. 최근 현역에서 은퇴한 우리 레전드 가운데는 ‘말하는 사람(Talker)’이 많은 데 비해 행동하는 ‘사람(Doer)’이 드물다. 단편적인 비교일 수 있지만 일본의 노모 히데오나 스즈키 이치로 같은 레전드가 사회인 야구, 유소년 야구에 기울이는 노력과 우리 레전드들이 방송 연예 프로에 출연해 보여주는 모습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1993년 프로축구 ‘J리그’를 출범시킬 때 ‘J리그 백년구상’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던 일본은 2014년 ‘사무라이 재팬’이라는 국가대표 야구 브랜드와 운영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과 체계를 통해 유소년, 여자야구부터 청소년, 성인 야구대표팀이 시스템적으로 운영된다. 이런 생태계의 체계화는 결국 그 사회가 야구라는 문화를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우리가 어떤 비전을 갖고 그것에 진심이라면, 이를 추진하기 위한 계획이 체계적으로 설계되고 실행되며 끝내 그 비전을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쯤에서 나는 한국의 야구 기성세대에게 묻는다. ‘우리는 야구에 진심인가? 그것은 목적인가 수단인가?’ .
이태일 스포티즌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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