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교수 "문재인 정부 적폐청산, 민주주의 위기 불렀다"
정치학계 원로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18일 “민주당 정부가 추진한 적폐청산과 역사청산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최 명예교수는 4·19를 하루 앞둔 이날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동아시아미래재단(상임고문 손학규, 이사장 임성훈) 주최로 열린 특별강연에서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최 명예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등의 저서를 쓴 한국 진보 정치학계의 원로다.
최 명예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노태우 정부의 3당 합당과 김대중 정부의 DJP 연합을 ‘협약에 의한 민주화’로 규정하며 “보수세력과 민주화세력 간 절묘한 세력균형이 1980년대 민주화로부터 2017년 촛불시위와 대통령 탄핵에 이를 때까지 한 세대에 걸쳐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2016년 대규모 촛불시위로부터 시작된 정치적 격변은 80년대 이후 순항하던 민주주의에 커다란 충격 효과를 불러왔다”고 덧붙였다.
최 명예교수는 그 원인을 문재인 정부가 주도한 적폐청산에서 찾았다. 그는 “문재인 정부 하에서 이뤄진 적폐청산·역사청산은, 1980년대 이후 한국 민주화를 만들었던 정치·사회적 기초로서의 민주화 세력과 권위주의 세력 간 협약의 부정과 해체를 의미한다”고 진단했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에서 진보·보수 간 정치적 갈등의 정도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강해졌고, 그것이 여러 영역에서 중첩되면서 민주주의의 안정적 운영을 위협하게 됐다”는 것이다.
앞서 최 명예교수는 2019년 한국국제정치학회가 주관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학술대회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기조를 “관제 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지난 대선 때인 2021년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와의 대담에선 “적폐청산을 모토로 하는 과거 청산 방식은 한국 정치·사회에 극단적 양극화를 불러들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분열을 초래함으로써, 개혁의 프로젝트가 무엇을 지향하든 성과를 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날 강연에서도 최 명예교수는 “역사청산이란 굉장히 위험하고 급진적이며, 민주주의에서는 가능하지도 않은 말”이라고 재차 꼬집었다.
문재인 정부의 출범 계기가 됐던 촛불시위에 대해 최 명예교수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본격적으로 분출하는 계기가 됐고, 포퓰리즘적 민주주의로 이어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민주화운동을 했던 젊은 세대(586세대)가 성장해서 실제로 어떤 정치를 하는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줬다. 정치학계의 연구대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화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민주주의 정치를 잘하는 게 전혀 아니다. 오히려 운동 중심으로 정치를 이해하다 보면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평가했다.
최 명예교수는 이러한 위기에 대해 “진보·보수 간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하더라도 개선할 수 있다고 전망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화 ▶한국 정당의 구조와 특성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변화 등 구조적인 데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특히 최 명예교수는 정당정치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최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모두 “당원 가입 숫자가 늘었다”고 홍보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최 명예교수는 “한국 정당의 하부기반이 존재하지 않거나 무너진 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촛불 시위 이후 시민운동이 민주당 정부의 운영·정책에 직접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이 정당과 차이가 없는 유사정당 역할을 했다”며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정당 밖, 언론, 시민운동, 또는 전문가들로부터 ‘아웃소싱’하는 것이 일반적이 됐다”고 분석했다. 21대 국회 구성을 들며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생산자 집단을 조직화한 당사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거나, 있다 해도 구색 맞추기”라며 “사회경제적 현실에 뿌리내리는 데 실패한 정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최 명예교수는 또 “이른바 ‘빠’ 현상 등 ‘팬덤’ 현상이 중심에 자리 잡은 온라인 행동주의가 전통적인 당의 역할과 구조를 송두리째 변화시켜 본래 정당 기능을 대체했다”며 “여야가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중심으로 수준 낮은 적대와 혐오를 이어간다. ‘팬덤 리더’는 있어도 ‘정당 리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질의응답에서 최 명예교수는 제3지대 신당 출현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국민이 양당의 적대적인 충돌에 대해 진력이 나고, 제3당의 비전이 설득력 있고 미래지향적이라면 3당의 출현이 긍정적인 역할을 굉장히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에 앞서 손학규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은 인사말에서 “거대 양당의 극한 대결이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고, 반도체 패권 전쟁 등 미·중 대결 속에 다가온 경제위기에 대한 정치적 대응 능력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손 고문은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 속에서 양당 간 정치적 대화는 단절됐고, 대의민주주의가 힘을 잃고 팬덤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며 “다원적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 정치체제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지원 기자 sung.ji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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