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육지에서 돌아가신 영령 위로하는 송광사수륙대재

오문수 2023. 4. 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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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관음포는 팔만대장경과 정지장군, 이순신 장군의 혼이 서려 있는 곳

[오문수 기자]

 코리아나호 선상에서 거행된 송광사 수륙대재 모습
ⓒ 오문수
17일(월), 여수 한려해상 코리아나호 선상에서는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을 비롯한 대중스님과 신도 7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수륙대재가 열렸다.

송광사 수륙대재가 열린 곳은 노량과 관음포 일대로, 관음포는 고려말 왜구를 무찌른 정지장군이 활약했던 곳이고 송광사 진각국사가 팔만대장경을 발상해 지리산 일대에서 뗏목으로 운반한 재목을 3년간 염장했던 곳이다.

또한 임진 정유 두 왜란을 치르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수륙재의 절차는 부처님의 위신공덕으로 악도에서 헤매는 중생을 건진다는 뜻이므로, 먼저 바다와 육지에서 돌아가신 고혼을 바닷가에 나가 청혼하는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코리아나호에서 거행된 송광사 수륙대재 모습
ⓒ 오문수
   
 수륙대재가 진행되는 동안 코리아나호 선상에서 기도하는 신도들 모습
ⓒ 오문수
 
다음에 불보살을 모시는 시련 의식과 부처님께 공양하는 불공, 모든 중생을 위하는 설법, 그리고 영혼들에게 베푸는 시식, 중생에게 베푸는 회향, 마지막 위패를 태워 영혼을 보내는 소전 의식으로 진행한다.
이번 법회에서는 조국 강산을 지키다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전에 미리 공덕을 쌓으므로써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예수재'도 함께 봉행했다.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시신을 처음으로 모신 충렬사를 참배하는 송광사 스님과 신도들. 뒤에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살짝 보인다.
ⓒ 오문수
  
 바다에 고기를 방생하는 송광사 신도 모습
ⓒ 오문수
 
49재나 수륙재(水陸斎)가 죽은 자의 명복을 빌고 그 고혼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하는 불교 의식인 데 반하여, '예수재'는 살아 있는 동안에 공덕을 미리 닦아, 사후에 지옥 등 고통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극락에 왕생하고자 하는 신앙에 의거한 불교 의식이다.
 
송광사 주지 진각국사... 몽골군 항거 위해 팔만대장경 다시 만들자 제안

조계총림 방장인 현봉스님이 '고려대장경 재조 판각불사는 바로 송광사(옛 이름 수선사)가 발상지'라며 자세한 내막을 설명해줬다.

송광사 제2대 주지인 진각국사 혜심은 1232년에 몽골군이 침입하여 팔공산 초조대장경판을 태워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며 막강한 몽골군에 항거하기 위해서는 대장경을 다시 조성해 불사가 신심을 결집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송광사를 상주처로 삼아 진주 '단속사' 주지도 겸한 진각국사는 하동과 남해를 오가는 동안 세도가인 '정안'과 함께 대장경의 재조 불사에 대해 논의하며 남해도를 둘러보았다.

당시 지리산 일대에는 산벚나무, 후박나무, 돌배나무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경판의 재목을 구하기 쉬우며 벌채 후 뗏목을 만들어 섬진강이나 뱃길을 따라 남해 관음포로 운반해 바닷물에 절여 말리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뗏목으로 운반된 목재는 관음포 앞바다에서 3년 동안 염장한 후 16년(1236년~1251년) 만에 완성됐다.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지역사 연구와 고려대장경 판각지 복원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김봉윤 대표가 팔만대장경의 역사가 관음포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세 가지를 말했다.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 김봉윤소장이 고려대장경 판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오문수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 보면 스님들의 기도 대상이 보였다.
ⓒ 오문수
 
"관음포는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는 곳으로 지리산 일대의 목재를 운반하기에 용이한 곳입니다. 또한 남해를 포함한 진주지역은 무신정권 실세인 최우의 식읍지였고 최우의 처남인 '정안'이 남해에서 대장경 조성에 참여했어요. 그리고 송광사 주지 진각국사 혜심이 남해 지역에 '화방사'를 중창하고 '망운암'을 창건하는 등 불교를 수용하는 여건이 조성되었습니다."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퇴한 정지장군

대장경을 판각한 지 132년이 지난 1383년(고려 우왕 9년)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연락을 받은 정지장군은 나주와 목포의 전선 47척을 이끌고 남해 관음포로 달려와 화포로 적의 선봉 17척을 완파시켰다. 왜군은 2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다.
 
 조심조심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통과한 코리아나호가 충렬사 앞 항구에 정박하고 있다.
ⓒ 오문수
 
 국내유일 범선 코리아나호는 마스트 높이가 30m에 달한다. 때문에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통과할 때 마스트가 다리에 닿을까 모두들 조마조마했다. 정채호 선장은 행사가 거행되기 전에 다리를 2번 방문해 줄을 내려서 실사했다고 한다. 조심조심 다리 밑을 통과할 때 모두의 입에서 내는 소리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었다.
ⓒ 오문수
       
임진 정유 두 왜란의 최후 전투가 일어난 노량해전

그로부터 215년 후인 1598년,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도독은 순천왜교성에서 귀국을 애걸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첨병으로부터 사천과 부산 남해 등지에서 소서행장을 구출하기 위해 집결한 왜수군 500척(1만 2000명)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두 장수는 병목지점인 노량을 전장으로 선택했다.
      
조명연합군은 백전노장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 80척, 진린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군 300척, 도합 수군 2만 1000명이 참전했다. 3만 명의 수군이 모여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 노량해전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11월 19일, "한 놈도 살려보내지 말라!"며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승리로 마감하며 순국했다.
    
 왼쪽 숲속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이락사'가 희미하게 보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바다가 팔만대장경을 재조하기 위해 목재를 3년 동안 염장했던 관음포이다. 대장경 판각 후 정지장군이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고 이순신 장군의 순국을 지켜보았던 바다이다.
ⓒ 오문수
   
여수를 기점으로 한 노량·관음포 앞바다는 남해안에서 가장 많은 인명이 살상된 곳이다. 지금도 여수국가산단과 광양제철 하동화력 등의 산업시설이 가득하고 산업단지를 오가는 유조선과 화물선이 즐비하다.

일행은 육지와 바다에서 고혼이 된 분들의 영면을 빌며 전쟁과 죽음의 바다가 사랑과 평화의 바다가 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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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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