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의 구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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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호 기자]
날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한 시 반쯤이면 교장실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녀석이 있다. 바로 인민군이다. 부족한 읽기 공부를 보충해 주려고 3월부터 지금껏 가르치고 있다. 한동안 공부 끝나고 교장실을 나서면서 인민군처럼 손을 이마에다 대고 거수 경례하는 모습이 하도 우스워서 속으로 붙인 별명이다. 그것도 여자애가.
10월 초순이었다. 교무실에서 교무행정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녀석은 국어는 좋아하는데 수학 공부는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구구단도 외우지 못한단다. 유창하게 읽는 공부를 가르치면 되었지, 수학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담임에게 맡겨 두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마음에 걸렸다. '초기 문해력이 보통 학력 이상으로 향상되더라도 기초 연산이 낮으면 결국 학습 부진을 면하지 못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시기적으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수학 공부가 싫은 아이에게 구구단 가르치기
며칠 뒤, 읽기 공부를 마치고 구구단을 외워 보라고 했더니 수학 공부가 싫단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꼭 외워야 해요?" 하면서 꺼리는 눈치다. 도와준다고 하면서 잘못해도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무려 4분 가까이 걸렸다. 그것도 도움을 주니까 가능했다. 예를 들면 어느 대목에서 막히면 두 수의 곱과 답을 화이트보드에 써 주면서 "여기에 같은 수를 더하면 얼마지?" 하는 식이다. 한마디로 반은 외웠고, 나머지는 덧셈을 하게 한 셈이다.
이대로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달 안에 너희 반에서 구구단을 제일 잘하도록 도와줄게. 그러면 3학년에 올라가서 수학 공부는 1등 할 걸." 안 믿는 눈치였다. "두고 봐,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냐?"
다음 날부터 읽기 공부를 시작하기 전과 끝나고 나서 한 번씩 구구단을 외우도록 도와주었다. 연산에 기초가 되는 가르기와 모으기, 합하여 10이 되는 수, 뛰어 세기 등도 함께 가르쳤다. 처음에는 매우 느려서 답답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나 처음에는 이런 과정을 겪는다고 위로해 주었다.
3주일쯤 지나자 혼자서도 도움 없이 천천히 할 수 있게 되자 집에서도 연습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2학년 중에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유일한 녀석이라 이것을 활용하도록 숙제를 내주었다. 녹음하고 파일을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내게 보내는 연습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핸드폰만 가지고 다녔지,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법은 몰랐던 것이다.
그날부터 저녁에 아이와 소통이 시작되었다. 처음 한두 번은 기다리는데도 소식어 없자 "왜 아직도 숙제를 안 하냐?"라고 전화했더니, 그다음부터는 파일을 보내놓고 "왜 아직도 확인을 안 해요?" 한다. 한번은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밥을 먹다가 녀석의 전화를 받고 보내온 녹음 파일을 들었다. 그랬더니 큰아들이 막 웃으며 "아빠, 무슨 소리예요?"라고 한다. 뜬금없이 전화기에서 구구단 소리가 나와서 황당했나 보다. 이제는 저녁에 전화벨 소리가 나면 그 녀석인지 모두 안다.
9단까지 외우는 속도가 2분이 채 걸리지 않기에 스케치북에 날짜별로 속도를 기록할 수 있도록 표를 만들었다. 그러자 하루가 다르게 빨라졌다. 그렇게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당초 목표한 1분 이내에 외웠다.
"한 번 잘한 것은 운이지, 자기 실력은 아니야." 다음 날부터는 세 번 재서 모두 합격하면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가 이마저 쉽게 도달하고 말았다. 당연히 재미있게 외우고 즐겁게 숙제한 덕이다. 시작할 때만 해도 힘들어하고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여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는데 목표에 도달하자 아이의 표정과 목소리가 달라졌다.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구구단을 외우고 나서 글 읽는 속도를 재려고 아이에게 책을 펴게 했다. 나는 핸드폰 스톱워치 앱을 활성화해 놓고 버튼을 누르며 "시작" 했더니, "이 일은 2, 이 이 4, 이 삼은 6……." 숨도 안 쉬고 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녀석은 멋쩍어하며 "구구단이 입에 붙었어요"라고 한다. 한참이나 같이 웃었다.
구구단 유창성 검사도 잘 통과한 아이
기초학력 전문가들은 2학년 말 구구단 외우기 실력이 3학년 이후의 수학과 성취도를 가늠한다고 한다. 그만큼 중하다는 이야기다. 외웠더라도 자동화시키지 않으면 이후 학년부터 문제가 생긴다.
곱셈과 나눗셈은 물론 도형의 넓이와 부피, 최대 공약수와 최소 공배수, 통분, 분수의 덧셈과 뺄셈, 비와 비례식 등 구구단과 관련된 영역의 문제를 해결할 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정확성도 떨어진다. 자연히 자신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기초 연산은 물론 문장제는 더더욱 해결하기 어렵다.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달리 생기는 것이 아니다. 3학년 되기 전에 구구단을 유창하게 외우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험으로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우리 학교는 학년별 구구단 유창성 기대 목표를 제시했다. 학년말을 기준으로 2학년은 1분, 3학년은 55초, 4학년은 50초, 5학년은 45초, 6학년은 40초 이내다. 내가 교감으로 발령받았을 당시 기초 학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 기준을 제시해서 수학과 학력을 높인 경험을 살린 것이다. 그래서 승진해서도 근무하는 학교에 이를 적용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문제 없다. 기초 학력 컨설팅에 가면 꼭 실천하도록 권장한다.
엊그제 전교생 구구단 유창성 검사를 지시했다. 2학기 들어 두 번째다. "너보다 잘한 녀석도 있냐?" 당연히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물었다. 그런데 49초에 외우는 녀석이 있다며 엄마가 지옥 훈련을 시킨단다. 그러면서 그를 좋아한단다. "네가 더 빨리 외우면 그 녀석도 널 좋아할 걸." 동기부여가 되었는지 도전해 보겠단다. 금요일 저녁에 파일을 보내왔는데 44초였다. 거의 숨도 안 쉴 뿐만 아니라 발음도 뭉갰다. 빨리 외우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마저 즐겁다.
이제 이 아이는 문해력과 수해력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그때마다 싫다고 한다. 계속 나랑 같이 공부하고 싶단다. 목표에 도달했으므로 이제 나도 좀 쉬고 싶다. 또, 내년에는 다른 아이도 봐 주어야 해서 계속 이 녀석만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절실히 원한다면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동화책으로 읽기 능력을 키워줄 생각도 있기는 하다.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데 끝까지 싫다고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즐거운 고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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