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기시다 꾸짖은 일본 성공회 주교

민병래 2023. 4. 1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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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소 하루히사 주교, 한국 성공회와 함께 강제징용 제3자 변제방식 철회 성명

[글쓴이: 민병래(작가)]

 2022년 10월 10일 성공회 오사카 가와구치교회에서 교회를 방문한 한국 청년과 기념 사진을 찍은 이소 하루히소 주교(가운데 흰 사제복).
ⓒ 이소 하루히사제공
 
부활절인 지난 4월 9일 대한 성공회 박동신 주교(부산교구)와 일본 성공회 이소 하루히사 주교( 오사카 교구)는 공동으로 "부당한 '일제시대 강제징용 해법 (징용공 해법안)' 철회를 요구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우선 한국 정부의 일방적 발표가 "피해자들의 염원과 권리를 짓밟은 것으로서 결코 미래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참혹한 역사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강제징용 자체를 부인하려 하는 일본 정부의 대응 역시 인정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이 즉각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배상에 나서라고 촉구하고 있다.

한·일 양국의 성공회 지도자가 함께 목소리를 냈고 성명의 내용도 무게감이 있기에 일본 성공회 오사카 교구의 유시경 신부를 통해 이소 하루히사 주교를 4월 17일 줌으로 만나 성명을 내게 된 배경과 문제의식을 들어보았다.

한국 성공회와 교류하며 식민 지배 실상에 눈떠

"한국과 일본의 성공회는 40여 년 가까이 협동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본 성공회는 한국 성공회를 만나면서 식민지 지배의 죄상과 전쟁 범죄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 덕에 일본 성공회는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식민 지배의 아픔으로 관계가 끊어졌던 양국 성공회는 1984년부터 다시 공식적으로 교류를 시작했고 일본 성공회의 사제들은 한국에 와서 식민 지배의 실상을 돌아보는 순방을 했다.

이소 하루히사 주교 역시 여러 차례 방한하여 3·1운동 탄압 시 일본군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신도들을 교회 안에 몰아넣고 불을 지른 제암리 학살 현장, 유관순이 갇혔던 서대문 형무소 등을 둘러보았다. 또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운동가의 유족을 만나 처절한 가족사를 들었고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갔을 때 유치원생들이 식민지 역사를 배우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2022년 연말 일본이 3대 전략문서를 공개하면서 전쟁 가능한 국가를 천명했을 때도 총회의 결의로 '헌법 개악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기시다 총리 앞으로 보냈습니다. 또 미국으로부터 무기 수입이 증가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내고 있습니다."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지만 일본 성공회가 1996년 5월 한국의 성공회 성당에서 한 '전쟁책임 선언'은 용기 있는 역사적 행동이었다. 최고 의결기관인 총회(제49회)에서 결의된 이 선언에는 일본 성공회의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담겨있다.
 
복음에 반하는 천황제 국가의 국체사상과 군국주의에 대해 타협을 거듭하여, 강하게 저항하고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지나사변 특별기원식, 대동아전쟁 특별기도 등을 통해 타민족 지배와 전쟁 협력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긍정하고 교세 확장과 체제 유지만을 지향하는 닫힌 교회에 머물러 주님의 복음이 보여주는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선언은 이렇게 패전 전에 보여줬던 일본 성공회의 자세를 반성하고
 
전쟁 후인 1947년, 1938년 판 기도서를 정본으로 채택해 천황의 지배를 신의 뜻으로 간주하며 성찬식에서 '우리의 금상이신 천황을 축복하소서'라고 사제가 기도했습니다. 전쟁 책임에 대해 가장 추궁받아야 할 천황과 그 국가체제를 긍정하는 기도서를 계속 이용하며 스스로의 자세를 바로잡는데 게을렀습니다.
 
라며 전후에도 제대로 거듭나지 못한 점을 스스로 꾸짖었다. 그리고

(1) 일본 성공회의 전쟁 책임 고백을 전 교회가 공유할 것.
(2) 일본이 침략한 여러 나라의 교회에 일본 성공회로서의 사죄의 의지를 전할 것.

등을 다짐했다.

이런 역사적 선언이 나오는 데는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에서 식민 지배의 실상을 체험한 것과 강제로 주민이 집단 자결하고 전쟁 후에도 미군기지로 인해 고통받는 오키나와 교구의 문제 제기가 크게 작용을 했다. 이 전쟁 선언 이후 일본 성공회는 교세가 작아도 범 교단 차원에서 인권과 평화를 위해 역사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왔던 것이다.

전쟁 책임 선언 이후 거듭난 일본 성공회

"일본 교회는 아시다시피 아주 작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 내의 일본 기독교, 재일대한기독교회 등이 서로 연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라든가 일본 내 여러 종교와도 협의체를 운영하며 저희들의 생각을 나누려 합니다."

이소 하루히사 주교는 비록 일본 성공회의 교세는 약하지만 크리스천과 모든 종교의 평화적 염원을 모으는 교량이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 교회의 사회적 발언에 대해 주저하는 평신도에게도 사회선교위원회를 통해서 학습회나 강연회를 열고 미사 시간에 강론을 통해 설득해 나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은 이번 성명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기도 했다.

한·일정상회담 이후 일본은 예상한 대로 '옛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강제 노동을 부정하고 있다. 일본이 4월 11일 발표한 '외교청서'를 보면 여전히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고 "역대 내각의 인식을 계승한다"는 입장조차 담지 않았다. 결국 윤석열 정부가 강제노동 배상 판결을 뒤집은 것이 일본의 극우 행보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고 말았다.
  
 지난 16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윤 대통령을 보고 있다. 2023.3.16
ⓒ AFP=연합뉴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이 행한 가장 극악한 강제노동 사례 중 하나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지바현 나라시노 수용소에 잡혀있던 조선인 300명을 시체 처리에 억지로 끌어낸 일일 것이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타 죽은 피복 창고 부근은 시체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으며 늦더위로 인해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시체 썩은 악취 속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일은 매우 고된 작업인 동시에 '기분 나쁜 일'이어서 작업 인부에 응모하려는 자가 없었다. 하루 일당 5엔에 3끼 식사를 제공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임에도 88명의 작업 인부가 반나절 만에 4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였다. 악취 때문에 졸도하는 사람까지 나오는 '일반 일본인이 혐오하는 노동'에 조선인을 동원한 것이다.
-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역사비평사 간 2005년 간 강덕상 저) 264쪽
 
끌려 나가 일한 조선인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요시찰 조선인'을 가려내겠다는 계엄 당국의 방침 때문에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구속된 사람들이었다. 갇혀 있는 것도 억울한데 '노동봉사대'란 이름으로 무보수 노동을 했고 이 시체 중에는 일본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학살된 동포의 시체도 있었으니 그 마음과 처지가 오죽했을까?

이런 강제노동의 만행은 1894년 11월 일본군이 당시 청나라 요동반도의 여순을 공격할 때도 나타났다. 일본은 여순을 함락한 다음 날부터 나흘 동안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해 모든 중국인을 학살했다. 당시 <뉴욕월드> 특파원 제임스 크릴맨(James Creelmans)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전 시내에서 단 36명만 살아남았는데 이 까닭은 시체 처리에 동원하기 위해서였고. '이 사람은 죽이지 말 것'이라고 표찰이 붙은 모자를 씌워 작업을 시켰다고 한다(<건건록>(논형출판사 2021년 간 무쓰 무네미쓰 저 130쪽 하단의 주4에서 인용).

일본이 저지른 강제노동 역사가 이러한데도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강제 노동에 대한 인도적 판결을 뒤집었으니 이는 정녕 역사의 물결을 거꾸로 돌리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그래서 한·일 양국 성공회 주교는 교세가 약하더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리라.
  
 2022년 10월 1일 오사카 조난 기독교회에서 재일본 한국 성공회 출신 성직자회와 함께. 맨 가운데가 이소 하루히사 주교. 왼쪽 끝이 오사카 교구의 유시경 신부.
ⓒ 이소 하루히사 제공
 
"한·일 양국 정부차원에서는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지만 시민사회와 종교계에서는 좌절하지 말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본의 청년세대가 한국의 문화를 좋아하지만 식민지 지배나 전쟁 위기에 대해 관심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더 자주 만나서 우정을 나누고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이소 하루히사 주교는 한·일 간의 연대와 우정이 아시아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며 용기를 잃지 말자고 한다. 일본 성공회는 꾸준히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고 있고 '오키나와의 아픔'을 제기하고 있다. 올해 9월 1일 관동 조선인 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기념 예배를 준비하고 있으며, 한·일 성공회 교류 50주년 행사를 내년 제주도에서 열어 평화와 연대의 마당을 열 작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종교인답게 이런 말을 남겼다.

"하나님께서 지금 과연 무엇을 원하고 계실까 생각해보는데요. 아마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샬롬'의 실현이라고 봅니다. 샬롬은 한국말로는 "안녕하세요. 안녕하시기를"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 모두 편안하고 건강하고, 그다음에 연대하고 공동체적으로 살아가자는 그런 종합적인 의미입니다. 징용공으로 끌려가서 고생하신 분들에 대해서 일본이 사죄하고 배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징용공과 함께 나누는 샬롬의 실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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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말> ① 일본성공회의 총회는 는 2년에 한 번 열리는 최고의결기구로서 각 교구 주교, 성직자 대의원, 신도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② 관동대지진시 사체처리를 묘사한 인용문은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역사비평사간 2005년간 강덕상저) 264쪽에 나온다. ③ 요동반도의 여순학살은 「건건록」 (논형출판사 2021년간 무쓰무네미쓰저) 130쪽 하단의 주4)에 나온다. 「건건록」의 부제는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비록'이고 저자는 당시 외무대신이었다. ④ 한·일성공회 두 주교의 성명 전문은 아래와 같다.   <성명서> 부당한 '일제시대 강제징용 해법 (징용공해법안)'철회를 요구한다   한일 성공회는 1984년 이후, 많은 사회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죄를 바탕으로 공동 프로젝트 등을 진행해 왔으며, 과거의 상처를 공유하고 치유와 화해를 향해 풀뿌리 차원에서 한일관계를 만들어 왔다. 양국 성공회의 치유와 회복과 화해를 위한 발걸음은, 세계성공회에서도 과거 식민지 지배에서 비롯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 한일 양국 성공회는, 지난 3월 6일 제3자에 의한 변제방식으로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일방적으로 발표는, 피해자들의 염원과 권리를 짓밟은 것으로서, 결코 미래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참혹한 역사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며, 이를 계기로 강제징용 자체를 부인하려 하는 일본 정부의 대응 역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양국의 미래를 위한 참된 화해는, 통렬한 반성과 진정한 사죄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는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일제식민지시대 강제징용 문제는, 이미 2018년 한국 대법원에서 비도덕적인 불법행위로 판결되었으며, 피고인 일본기업에 배상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대해 한일 양국 성공회는,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과거의 참혹한 역사를 금전적으로 간단히 해결하려는 비성서적, 비윤리적 역사인식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며, 이번 한국정부의 발표와 같은 방안은 진정한 해결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또한, 한국정부 발표의 배후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대로,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를 통한 신냉전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오히려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우리 모두를 새로운 위협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한일 양국 성공회는, 이후로도 깊은 유대와 협동을 위해, 한일 간에 가로놓인 일제시대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은, 한국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이 아니라, 일본의 강제징용에 대한 사죄와 책임 이행, 그리고 피해자와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더불어 아래 사항을 요구한다.   - 한국정부는, 강제징용에 관련된 일본기업이 참가하지 않은 제3자 변상안을 철회할 것 - 강제징용에 관련된 일본기업과 일본정부가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법적 배상을 이행할 것 - 양국 정부는 피해자의 고통과 요구에 답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   2023년 4월 9일 대한성공회 한일공동위원회 위원장 주교 박동신(대한성공회 부산교구 주교) 일본성공회 일한협동위원회 위원장 주교 이소 하루히사(일본성공회 오사카교구 주교)     ⑤ 일본성공회의 전쟁책임 선언 일본어 원문은 아래와 같다   <聖公会の戦争責任に関する宣言>   第49(定期)総会決議第34号・1996年5月 1)日本聖公会は、戦後50年を経た今、戦前、戦中に日本国家による植民地支配と侵略戦争を支持・黙認した責任を認め、その罪を告白します。 1945年、日本聖公会は日本によるアジア太平洋諸地域に対する侵略と植民地 支配の終焉という歴史的転機に立ちました。その年の臨時総会告示で、佐々木鎮次 主教は戦時下の教会の反省を述べ、「国策への迎合」「教会の使命の忘却」を指摘しました。このとき、総会も主教会も教区も各個教会も預言者的働きをなしえなかったことを深く反省し、日本が侵略・支配した隣人へ心から謝罪し、真実に和解の関 係を公会として求めるべきでありました。 日本聖公会は、設立以来、福音に反する天皇制国家の国体思想や軍国主義に対し、 妥協をつづけ、強く抵抗し拒む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日本聖公会が英国、米国、 カナダなどの聖公会と繋がりを持つゆえに、官憲の圧迫を受け、信仰の戦いを経験 した牧師、信徒もいましたが、その苦汁の経験にもかかわらず、わたしたちの教会 は、抑圧され苦しむ人々と共に立つ姿勢を持ちえませんでした。また、国際的な交 わりを持つ教会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侵略戦争による加害者としての国家の姿に目を開く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むしろ「支那事変特別祈願式」「大東亜戦争特 別祈祷」などを用い、他民族支配や戦争協力をキリスト教の名において肯定し、教 勢の拡張や体制の維持のみをめざす閉ざされた教会にとどまり、主の福音が示す 「地の塩」としての役割を果たす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2)日本聖公会は、敗戦後、すみやかにこの過ちを認めなかったこと、また戦後の50 年も自らの責任を自覚せず、和解と補償のため積極的に働くことなく今日にいたっ たことを、神の前に告白し、アジア・太平洋の人々に謝罪します。 戦後、日本聖公会は1947年第22総会において、1938年版の祈祷書をそ のまま正本として採用しました。その祈祷書には、天皇の支配を神の御旨とみなす 「天皇のため」「紀元節祈祷」などの祈祷文がありました。さらに1959年祈祷 書改正まで、公会問答において「隣に対してなすべきこと如何」の答えとして「... 天皇陛下とその有司(つかさ)に従い...」と教え、聖餐式の中では「すべて主権を 持つもの殊にわが今上天皇を祝し」と司祭が祈りました。このように戦後もなお、 戦争責任においてもっとも問われるべき天皇やその国家体制を肯定する祈祷書を用い続け、自らの姿勢を自覚的に正すことを怠ってきました。 皇国臣民化政策の結果、引き起こされた沖縄戦の住民虐殺や強制集団自決、さらに戦後における米軍基地の脅威などの沖縄の経験は、沖縄教区を通して語られつづけ、1972年の日本聖公会への移管に向けて「歴史と現状を理解してほしい」との沖縄教区からの問いかけがありました。しかし、その後も日本聖公会として応答することを怠ってきたことを、反省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3)日本聖公会は、差別体質を戦後も克服できないでいることを告白します。神の民として正義を行うことへと召されていることを自覚し、平和の器として、世界の分裂 と痛み、叫びと苦しみの声を聴き取ることのできる教会へと変えられることを祈り 求めます。 以上わたしたちの悔い改めの徴として次のことをすすめていきます。 (1)日本聖公会の戦争責任の告白を全教会が共有すること。 (2)日本が侵略した諸国の教会に対し、日本聖公会としての謝罪の意志を伝えること。 (3)歴史的事実の認識と福音理解を問い直し深めるための取組みを、各教区・教会の中で継続してすすめる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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