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설 선생 추모제 열려... 유가족 괴롭힌 '레드 콤플렉스'
[이명옥 기자]
▲ 기념촬영 추모제 참석 후 서울팀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이명옥 |
6·10만세운동의 주역이자 항일투쟁열사로 알려진 막난 권오설 선생(1897~1930)의 93주기추모제가 지난 17일 오후 3시에 경북 안동시청 대동관 낙동홀에서 진행됐다. 4월 17일은 막난 권오설 선생이 일제의 고문과 구타로 순국한 날이다. 2018년 첫 추모제가 안동에서 거행된 후 코로나로 4년 만에 추모제를 열게 됐다.
▲ 넋전춤 양혜경 무용가의 넋전춤 |
ⓒ 이명옥 |
이어진 추모공연은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며 무용가인 양혜경의넋전춤, 박학봉 시인의 추모시, 문진오 노래하는 나들 대표의 권오설 선생에게 바치는 추모곡으로 마무리됐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항일투사 막난 권오설 선생은 1897년 경북 안동 풍천면 가곡리에서 출생했다.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퇴학 당 한후 서울 중앙고보에 다니다가 경제 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했다.
1919년 3. 1운동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후 1923년까지 교육운동 사회계몽운동 농민운동에 전력한다. 이후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상임집행위원으로 선출된 후 조선노농총동맹을 이끌면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고 알려져있다. 이어 1926년 융희황제(순종) 승하 직후 상해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인사들과 6.10만세 운동을 계획, 만세운동 투쟁지도부인 6.10투쟁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책임을 맡아 총기획을 했으나 6.10 만세 운동을 보지 못하고 6월 7일 일제에 피체돼 미결수로 지내다가 1928년 2월 14일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된다.
선생의 나이 33세, 1930년 출옥을 3개월여 앞둔 4월 17일 고문으로 인한 피멍이 자국이 가득한 상태로 옥중에서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권오설 선생 평전은
저자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출판사 '푸른역사'에서 2010년 발간되기도 했다).
일제는 고문의 흔적을 감추려 선생 시신을 철관에 밀봉하여 가족에게 인계했으며, 선산이 아닌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 봉분 없는 평장으로 할 것을 강요했고 조문객도 받지 못하게 했다. 장례 이후에도 6개월간 경찰이 밤낮으로 선생 묘소를 감시했다고 한다(관련 기사: '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을 찾아서... "녹이 시뻘건 '철관' 본 순간, 눈에서 불이 났다" https://omn.kr/1tsui ).
▲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 사진제공 권우성 |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입구에 세워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 민족독립을 위해 몸 바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삶과 뜻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1월 11일 세워졌다. |
ⓒ 권우성 |
2001년 권오설선생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11월 11일 추모비가 세워졌다. 이후 2005년 3.1절에야 매번 훈장추서에서 제외되던 권오설 선생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2008년 4월 14일 부인과 합장하기 위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 묻혔던 선생의 무덤을 파헤치자 철관이 발견된다,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해 뚜껑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일제의 잔악한 실체를 볼 수 있다.
한편 유족인 아들 권대용(1948년 생) 선생은 소위 '빨갱이 후손'이라는 오명으로 불리며, 어린 시절 마을 사람들로부터 심한 핍박과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살던 집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해 살림살이는 하나도 꺼내지 못한 채 권오설 선생 관련 자료만을 꺼내 인근으로 이사를 갔으나 그곳에서도 의문의 화재로 타다 남은 자료만을 들고 나온 후 40세에 고향 마을을 떠나 대구에서 생활해왔다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빨갱이 가족이라고 핍박받으며 살아온 고달픈 삶이 그려져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언제쯤 '레드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사람을 그리워했지만 그들에게 선뜻 다가서지는 못했어요, 말을 걸기가 두려웠지요. 하지만 함께 해주시는 여러분들이 계셔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벌써 그립고,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 집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 인사말 하는 권대용 선생 권대용 선생이 배웅 인사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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