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에게 글쓰기를 맡길 때 잃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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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경 기자]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2년 뒤엔 당신보다 훨씬 더 똑똑해질 겁니다."
▲ 챗gpt를 향한 조던 피터슨의 경고 |
ⓒ 유튜브 자유의지 |
그러나 이미 침범은 시작 된 상태였다. 대표적으로 챗GPT는 글쓰기 영역을 빼앗아갔다. 조던 피터슨 말처럼 "AI모델은 언어 말뭉치에서 세상 모형을 추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챗GPT는 제법 그럴싸한 글 한 편을 쓸 수 있다.
에세이를 쓰고 시나리오를 쓰며 논문도 쓰고 소설까지 쓴다고 하니, 글이란 글은 다 쓰는 셈. 심지어 챗GPT는 책까지 쓰기 시작했는데 가관인 것은, 애걔? 글 한 편을 위해 인간이 소모하는 시간과 에너지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꼴로 뚝딱 글을 써냈다고? 2~3시간 머리를 쥐어 짜가며 모니터와 씨름해야 하는 글 노동꾼에겐 다소 힘 빠지는 소식일 수 없다.
그래서겠지만 이 노올라운 챗GPT의 능력을 본 인간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이제 글쓰기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챗GPT한테 맡기면 되잖아!"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들은 글쓰기로부터의 해방에 만세를 외친다. 아싸, 이제 쓰지 않을 수 있어 하고.
챗GPT 탄생에 엄중한 경고를 내리던 조던 피터슨과는 퍽 다른 표정으로 이를, 쓰기로부터의 탈출을 반기는데…. 짧지 않은 시간 글을 쓰며 지덕체를 단련해 온 나는 의문이 생긴다. 과연 그럴까? 나를 대신해 써 줄 그가 존재하므로 더 쓸 필요가, 정말 없어진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물론 "아니다". 이와 같이 결론 지을 수 있었던 건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인용구 덕이었다. 이를 그대로 따와본다.
"사람들은 흔히 아이가 곧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 말에 100% 동의한다. 아이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서가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 <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류쉬안 저/원녕경 역
챗GPT와 글쓰기에 관해 논하다 대뜸 아이 양육 이야기가 나와 잘못 인용한 것 아니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겠으나, 제대로 모셔온 글이 맞다. 단지 저기서 전하고 싶던 메시지는 바로 '과정'이라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류쉬안 작가는 말했다. 아이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서가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배움이 일어난다. 아이를 스승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양육 과정에 기인한다. 이는 비단 양육에서만 일어나는 배움은 아니다. 상당히 많은 일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 글방에서도 울대에 힘 줘가며 강조한 이야기가 있다.
"글쓰기로 내면 치유하기, 사고력 및 논리력 향상, 나를 알아가기…. 이 모두는 글 쓰는 '과정'에서 전부 일어납니다. 글은 발신과 수신이라는 전달 과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렇고요. 요즘 일정 목적-내면을 치유하려고 써요 등-을 가지고들 글을 쓴다고 하시는데, 사실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글의 종류를 정해 놓고 쓸 때 강하게 발휘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다시 말하건대, 글을 쓰면 어떤 특정 작용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글을 쓰면 이 모두는 동시다발적으로 해결돼요. 그러니까 썼을 때 말입니다. 그러니 쓸 수밖에 없는 거죠. 쓰지 않으면 무엇도 얻을 수 없으니까요."
예를 들면 이런 식. 글은 전달이라는 본질적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수신자를 염두에 둔 발신이라는 '과정'에서 글 쓰는 동안 다음이 발발한다.
1. 치유(힐링) : 심리상담 시 중요 포인트란 내담자가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게 하는 것이란다. 내면으로 침잠하던 나를 밖으로 꺼내 보이는 과정이겠다. 그러한 점에서 글쓰기는 말하기와 같다. 글을 쓰고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는 과정으로 치유가 이루어진다.
2. 논리력 향상 : 글은 로고스의 세계, 즉 논리가 받쳐주지 않으면 아예 말이 되지 않는(Not make sense)다. 논리를 필연으로 하며, 쓰고 묵독하고 다시 쓰고 묵독하는 과정에서 자기 논리의 비어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채우며 향상될 수밖에 없다.
3. 사고력 향상 : 마찬가지로 쓰며 드러난 공백을 사고를 통해 채워 넣어야 하므로, 채우며 향상될 수밖에 없다.
4. 학습 : 글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재해석과 재구성을 하게 된다. 모르는 부분은 쓸 수 없고, 그러니까 재해석과 재구성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내 지식 어디가 빠져 있는지 분명히 할 수 있다. 이 부분을 학습하면 그만이다. 윌리엄 진서 저서 <공부가 되는 글쓰기>에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챗gpt와 글쓰기 |
ⓒ 언스플래시 |
5부터 점 처리 한 것은 글 쓰는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 더 길게 나열할 수 있겠으나 다소 수다스러워 보여 일절만 하겠다는 소리. 글쓰기란 이득이라기 보다 개이득에 가까워 하는 널 위한 소리. 그러니 챗GPT 시대와는 무관하게 글은 쓸 수밖에 없다는 나의 결론이다. 그 아무리 인간보다 잘 쓴다한들 내게서 '과정'을 빼앗아 버린다면 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글쓰기에서 얻는 효과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중'에. 결과는 도출된 값에 불과하다. 챗GPT가 쓴 결과 값인 그 글은 하나의 창조물로 역할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애초에 쓰고자 했던 본질과 같던 이유는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과정은 쏙 빠져 있을 테니까.
다만 챗GPT가 글쓰기에 상당한 조력자 역할은 할 수 있겠다. 가령 주장에 따른 맞춤 근거를 찾아준달지, 대신해 자료를 수집한달지. 물론 이 또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효과는 무시해야겠지만 어쨌거나 글쓰기 측면에서만 본다면 보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챗GPT 그에겐 그의 할 일이 있고 인간에겐 인간의 할 일이 있다.
"그러니까 썼을 때요. 쓰는 과정 없이 기대할 수 있는 나는 없어요."
쓰지 않는 한 기대할 수 있는 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과정을 무시하는 자에게 장밋빛 꿈은 없다. 모든 것은 과정에 있다. 그래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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