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짝퉁 쿠쿠' 말고 또 있다…北, 개성공단 공장 30곳 무단가동
북한이 2016년 2월 전면 폐쇄된 개성공단 내의 한국 공장 30여곳을 무단 가동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북한이 무단 가동하던 우리 기업의 공장은 10여곳에 불과했는데, 최근 그 규모가 3배 가까이 늘었다. 과거 개성공단에 입주했던 125개 한국 기업 소유의 공장 중 설비 가동이 가능한 곳을 추려 돈벌이 수단으로 불법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17일 복수의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북한이 개성공단 공장 내 설비를 불법적으로 가동하고 공단 폐쇄 당시 우리 기업이 미처 회수하지 못한 원자재까지 임의로 사용하는 정황을 확인했다. 군 관측 카메라를 비롯한 정보자산을 활용해 개성공업지구의 전반적 동향을 파악한 결과다. 북한의 이 같은 행태는 재산권 침해일 뿐 아니라 남북 투자보장 합의서 및 개성공업지구법 위반에 해당한다.
관련 사정에 밝은 정보 관계자는 “북한은 과거에도 암암리에 개성공단 우리 기업 소유의 공장과 설비를 외화벌이에 활용했는데 최근엔 아예 대놓고 공장을 본격 가동해 물품을 생산·판매하고 있다”며 “심지어 북한이 개성공단 시설을 활용해 임가공한 물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중개하는 브로커가 북·중 접경지역은 물론 국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北 최대치로 개성공단 불법 활용"
북한은 현재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개성공단 시설을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복수의 정보 소식통은 “개성공업지구의 전력 사정과 버스 등 북한의 운송 차량 보유량을 감안할 때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최대치로 가동할 수 있는 공장이 30여곳이고, 현재 정확히 그 정도 규모의 공장을 돌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중 쿠쿠전자·사마스전자·명진전자·제씨콤 등 한국 기업의 공장 20여곳에선 전기·전자 장비 등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큰 제품이 생산되고 있다. 정보당국이 브로커의 활동 내역과 북·중 간 유통된 제품을 조사한 결과 이 중 일부는 평양백화점 등에서 자체적으로 판매하고, 나머지는 중국과 러시아 등을 거쳐 수출한 뒤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생산·판매하는 대표 상품은 밥솥이다. 과거 개성공단 폐쇄 당시 한국 쿠쿠전자는 완제품 1만여개와 완제품 42만여개를 생산할 수 있는 부품을 공장에 남겨둔 채 철수했는데, 북한은 이를 활용해 밥솥을 생산한 뒤 ‘압력밥가마’라는 상표로 평양백화점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불법 생산된 ‘짝퉁 쿠쿠’는 6인분 밥솥의 경우 50달러, 10인분 밥솥은 80달러에 판매된다고 한다.
신원·범양글러브·IS레포츠 등 또 다른 8~10곳의 공장에선 섬유·의류 봉제 등 임가공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2017년 9·12월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2375·2397호)에 따라 섬유 제품과 전자 기기를 수출할 수 없다. 하지만 개성공단 공장에서 불법적으로 가공·생산한 제품을 중·러 등 우방국의 유통망을 활용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제재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김정은 정권의 핵·미사일 자금으로 활용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10년 만에 장관 성명 "강력 경고"
지난 6일 통일부가 “개성공업지구 내 우리 기업 공장을 무단 가동하는 것을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의 통지문을 북한에 발송한 배경엔 이 같은 이유가 있다. 하지만 북한은 통지문 수령을 거부한 데 이어 이튿날인 지난 7일부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및 군 당국 간 통신선을 일방적으로 차단했다.
한국의 문제 제기에 북한이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직접 나섰다. 권 장관은 지난 11일 성명을 통해 “(개성공단 무단 가동은) 결국 북한 스스로를 고립시켜 더욱 어려운 지경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한다”고 비판했다. 통일부 장관이 본인 명의의 성명을 발표한 건 2013년 7월 이후 10년 만이다.
북한이 자존심을 버린 채 개성공단을 무단 사용하는 건 대북제재가 사방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안보리는 2006~2017년 총 13건의 대북제재 결의를 채택했고, 북한은 외부와의 교역 및 경제 협력이 사실상 불가능한 외톨이 국가로 전락했다. 우선 핵심 광물이 풍부한 자원 부국으로 평가받지만 일체의 수출이 불가능하다. 해산물·식료품·농산물·섬유제품도 마찬가지다.
또 북한 주민의 해외 노동은 전면 금지됐고, 북한을 드나드는 모든 화물은 검색 대상이다. 경제·산업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원유(400만 배럴)·정유(50만 배럴) 수입 역시 상한선이 설정돼 있다.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후 지난 30년간 북한 정권이 핵·미사일 고도화에 집착하며 야욕을 키우는 사이 북한 경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유다.
주민은 굶는데 핵·미사일에 돈 '펑펑'
하지만 북한은 아사(餓死)자가 발생할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한 ‘핵 무력 노선’을 강화했다. 지난해 73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데 5억6000만 달러(약 7200억원·한국국방연구원 추산)를 쏟아 부었다. 1년 치 식량 부족분(2022년 기준 120만t)을 사고도 남는 돈이다.
올해엔 총 9차례에 걸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는데, 이 중 3발은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었다. ▶핵 어뢰 시험 발사 ▶모형 핵탄두 공중 폭발 시험 ▶전술 핵탄두 ‘화산-31’ 공개 등 최근 북한의 무력 도발 동향엔 핵무기 실전 배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겼다. 온갖 제재에 포획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법을 체득한 셈이다.
북한의 이 같은 제재 회피는 국경 봉쇄가 풀릴 경우 한층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상 모든 북·중 접경 지역이 불법 교역의 창구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북·중 교역의 핵심 지역인 중국 단둥(丹東)을 중심으로 북한이 조만간 국경을 개방할 것이란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외교 소식통은 “단둥 등 북한 접경지역의 무역회사와 상인들은 이미 교역 재개를 위한 준비 작업까지 끝마쳐 놓은 상황”이라며 “지난해 하반기에 이미 철도 교역 확대를 위한 북·중 실무 협의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고, 2~3개월 안에 단둥을 통한 육로 교역도 재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봉쇄 해제시 제재 회피 급증할 듯
실제 북·중 무역 규모는 지난해부터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중국 해관총서가 발표한 지난해 북·중 무역총액은 10억 2771만 달러(약 1조 3400억원)를 기록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넘었고, 특히 2021년(3억 1800만 달러)와 비교했을 때 3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은행이 추산한 2021년 북한의 무역 총액은 7억 1000만 달러인데, 북한 입장에선 중국과의 교역이 전체 교역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북한의 우방국인 러시아 역시 지난해 11월 연해주 하산역과 북한 두만강역을 잇는 북·러 철도 교역을 재개한 이후 교역량을 늘리고 있다.
중·러는 공식 교역 통계에 잡히지 않는 대북 불법 해상 환적도 확대하고 있다. 북한이 식량과 원유·정유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광물 등 대북제재에 따라 수출이 금지된 품목을 받는 식이다. 중·러가 북한의 제재 회피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뒷배’ 역할에 나서며 사실상 핵·미사일 개발을 용인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보당국 핵심 관계자는 “북한이 제재의 빈틈을 뚫고 생존법을 체득하며 ‘제재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대북제재가 없을 때와 비교하면 같은 노력 대비 북한이 얻는 수익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며 “새로운 수입원을 차단하는 신규 제재를 강화하고 기존 제재망의 빈틈을 메워, 북한이 제재를 회피했을 때의 리스크와 기회 비용을 키우는 방식으로 압박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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