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막아세운 폴란드…전쟁에 뭉쳤던 EU, 불화 시작됐다

박형수 2023. 4. 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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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회원국인 폴란드와 헝가리가 자국 농산물 보호를 위해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을 한시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EU 집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경고했지만, 불가리아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유사한 조치 도입을 위한 검토에 들어갔다. 그간 ‘우크라이나 지원’을 옹호해온 EU의 단일대오가 농산물 갈등을 계기로 균열이 갈 수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1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파이낸셜타임스 등에 따르면, 이날 헝가리 농업부는 우크라이나산 곡물과 유자종자(해바라기·유채 등 기름을 짜기 위한 씨앗) 등 농산물 수입을 오는 6월30일까지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전날 폴란드 농업부는 곡물·육류·달걀·유제품 등 수십 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산 농식품 수입을 6월 말까지 일시 중단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싣고온 곡물. 폴란드 정부는 우크라이나 농산물을 한시적으로 수입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AP=연합뉴스


특히 폴란드는 제3국으로 수출되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자국을 경유하는 것까지도 차단했다. 발데마르 부다 폴란드 경제개발기술부 장관은 15일 트위터에 “폴란드 경유 금지를 포함해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금수 조치가 완전히 시행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루마니아 역시 16일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입 금지를 고려하고 있다고 현지 BTA 통신에 말했다.


동유럽에 쌓인 우크라産 저가 농산물


동유럽 국가들이 잇따라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금수 조치를 시행한 까닭은, 그간 값싼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동유럽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이 지역 농산품 가격 폭락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흑해 항로를 통한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이 사실상 차단되면서 아프리카·중동 수출길이 막히자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루마니아 등 동유럽을 통과하는 육로를 이용해 곡물을 운송해왔다.

애초 EU는 육로로 넘어온 우크라이나산 곡물을 인근 항구로 운반해 중동과 아프리카로 재수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동유럽으로 들어온 곡물들은 트럭과 기차 등 교통 인프라가 열악해 항구로 운송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됐다. 아울러 EU는 역내 식량 공급망과 우크라이나 농가 보호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대해 오는 6월 30일까지 무관세 조치를 내렸다.

이에 헐값의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대량으로 유입된 동유럽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는 등 농업 시장에 큰 타격이 이어졌다. 특히 지난해 중부와 동부 유럽 지역에 풍년이 들면서 공급 과잉 현상이 심화돼, 1년 전 1t에 1500즈워티(약 46만원)하던 폴란드 곡물 시세가 최근 750즈워티(약 23만원)로 반토막이 났다.

루마니아의 곡물 취급 업체에서 우크라이나 곡물 하역을 감독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국경 봉쇄, 시위…농민 불만 폭발


최근 동유럽 국가에선 농민들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입에 반대하는 시위가 빗발치고 있다. 시위대는 우크라이나의 트럭이 자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경을 따라 트랙터로 교통과 국경 검문소를 막아서기도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 등은 지난달 EU에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대한 무관세 조치를 철회하는 긴급 조치를 내려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EU 집행위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대한 관세 면제를 1년 연장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채 별다른 조치를 내놓지 않은 상태다. 손실을 입은 동유럽 국가에 5630만 유로(약 812억원)의 보조금을 제안했지만 회원국의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슈트번 너지 헝가리 농업장관은 “헝가리와 폴란드는 의미있는 EU의 조치가 없는 상황에 적절한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로버트 텔루스 폴란드 농업장관은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이 폴란드에 머물지 않고, 유럽 깊숙이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EU의 조속한 추가 조치를 촉구하기 위해 이번 금수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폴란드 북서부 슈체친 지역에서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우크라이나산 곡물 유입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농산물 갈등, 우크라-동유럽 불화 징후"


EU와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국가들의 금수 조치에 즉각 반발했다. 미리암 가르시아 페러 EU 집행위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EU 회원국의 무역정책은 EU의 독점 권한이므로, 개별 회원국의 일방적 조치를 용납할 수 없다”고 엄중 경고했다. 이어 “(전쟁이라는) 어려운 시기엔 EU 내에서 모든 결정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콜라 솔스키 우크라이나 농무부 장관은 16일 헝가리 장관과 회담을 갖고 “일방적인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전날은 폴란드 정부에 “폴란드 농민의 어려움을 이해하지만, 우크라이나 농민들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처지임을 이해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지난 5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폴란드를 방문해 농산물 분쟁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이 동유럽과의 분쟁 씨앗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FT는 농산물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와 동유럽 국가 간 갈등이 쉽게 잦아들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매체는 “폴란드·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주요 국가들이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각국 야당은 농촌 유권자들의 지지에 의존하고 있는 보수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곡물 분쟁을 격화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농산물 갈등은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 중 하나였던 폴란드에 불화의 징후로 번지고 있다”고 전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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