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스쿨존이라는 전쟁터

이영미 2023. 4. 18. 04:03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대전에서 어린이보호구역을 걷던 9살 아이가 60대의 음주운전에 목숨을 잃었다.

서울에서 하굣길 9살 초등생이 30대 만취 운전자에게 희생된 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다.

광주 스쿨존에서는 유모차 끌던 30대 엄마와 세 아이가, 인천에서는 10살 초등생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화물차에 치였다.

나는 이게 스쿨존에 대한 백래시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대전에서 어린이보호구역을 걷던 9살 아이가 60대의 음주운전에 목숨을 잃었다. 서울에서 하굣길 9살 초등생이 30대 만취 운전자에게 희생된 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다. 그 전해에도, 그 전전해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다. 광주 스쿨존에서는 유모차 끌던 30대 엄마와 세 아이가, 인천에서는 10살 초등생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화물차에 치였다.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이 부족했던 건지. 윤창호법과 민식이법으로도 비극은 막지 못했다.

한편에서는 맹렬한 퇴행도 벌어졌다. 스쿨존 백래시랄까. 스쿨존을 향한 운전자들의 분노와 공격이 양지로 나와 공론장에서 폭발했다. 여론조사를 보면 주축은 20대 남성층. 대전 사망사고 후 뒤따른 스쿨존 점검 기사에는 “문제는 스쿨존 아니고 음주운전” “스쿨존으로 물타기 말라” “음주사고인데 스쿨존 타령” 같은 댓글이 쏟아졌다. “민식이법=애 잘못도 운전자 탓”이라거나 “무법천지 날뛰는 아이들 때문에 죄없는 운전자만 처벌” “초라니(초등학생+고라니)는 밀어버려야 함” 같은 악플도 흔했다. 현실에서는 보호구역인 스쿨존이 온라인에서는 아이들을 한데 몰아넣고 조롱하는 혐오의 자유구역이 된 꼴이다.

“약자든 강자든 법은 공평해야 하지 않나?” 스쿨존을 공격하는 논리는 한줄 댓글이 웅변한다. 그들은 도로를 차량과 보행자가 대등하게 경쟁하는 경기장으로 여긴다. 링 위에서는 게임의 룰이 모든 것이다. 지키면 안전하고 어기면 위험하다. 9살 보행자도, 8t 트럭도 예외는 없다. 공정하고 공평하고 가차없이.

당연하게도 현실의 도로는 체급이 정해진 링이 아니다. 누가 잘못했든, 그저 실수일 뿐이라 해도 사고가 나면 그걸로 끝. 피해는 차 대신 보행자, 어른 대신 어린이에게 파괴적으로 불균등 배분된다. 스쿨존의 정신은 이 압도적 비대칭성 위에서 성립한다. 게다가 세상은 130㎝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설계된 놀이동산이 아니다. 성인에게는 허리쯤 오는 불법 주·정차 차량과 가로수·현수막·대형화분 같은 시설물이 아이들에게는 시야를 막는 죽음의 장애물이 된다. 도로 자체가 불공정한데 법이 어떻게 공평해지나.

나쁜 얘기만 했지만 반복되는 비극에도 우리에게는 낙관할 이유가 충분하다. 우리나라 교통환경은 극적으로 좋아지는 중이다.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21.8명(2000년)에서 5.6명(2021년)으로 급감했다. 독일(3.3명), 일본(2.7명)의 두 배 수준이지만 이 속도라면 따라잡는 게 꿈은 아니다. 연간 어린이 사망자도 20명대까지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전적으로 스쿨존 덕분이다. 비극이 반복되면서 효용을 의심받는 그 스쿨존 말이다. 음주운전 역시 기대만큼은 아니어도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 1000명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사망자는 최근 20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물론 여전히 나쁘다. 다만 어느 석학의 말처럼 나쁘다는 진단과 좋아지는 방향을 구분하는 건 언제나 중요하다. 그래야 비관하지 않는다.

지금 주목할 건 유독 좋아지지 않는 보행자 사고다. 국내 보행사망자는 여전히 OECD 평균의 3배가 넘는다. 나는 이게 스쿨존에 대한 백래시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믿는다. 대한민국에서 보행자가 더 많이 죽는다면 차와 보행자가 지닌 힘의 불균형 때문이고, 그런 불균형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야말로 스쿨존과 민식이법을 공격하는 힘이다. 확대해보자면 약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테고. 당연하지 않나. 가장 날렵한 사람의 속도에 모두를 맞추면 약자는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정부는 스쿨존 제한속도를 시간대별로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이 진짜 그것뿐인가.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