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봉호 (1) 해마다 생일이면 가난과 죽음의 아픈 어린 시절 떠올라

유경진 2023. 4. 1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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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이원수 시인의 고향처럼 봄이 되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학야리다.

그러나 나에게 각인된 고향의 풍경화는 그런 '꽃 대궐'이 아니라 가난, 배고픔, 아픔, 죽음으로 점철된 잿빛 세상이다.

내 생일에 그 아픔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1937년 5월 14일(음력)에 태어났지만 1938년 8월 18일에 출생 신고가 이뤄져 그날이 나의 공적 생일로 정착되었고 지금까지 그 가짜 생일을 지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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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전염병에 시달리던 일제강점기
아이들 중 절반이 한돌 전 세상 떠나자
선친께서 1년 기다렸다 늦게 출생신고
일제 강점기 시절 경북 포항 북구 상원동의 거리 풍경. 포항시 제공


내가 태어난 곳은 이원수 시인의 고향처럼 봄이 되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학야리다. 지금은 포항시 북구다. 그러나 나에게 각인된 고향의 풍경화는 그런 ‘꽃 대궐’이 아니라 가난, 배고픔, 아픔, 죽음으로 점철된 잿빛 세상이다.

나는 평생 매년 한 번씩 그 어두운 풍경을 떠올려야 한다. 내 생일에 그 아픔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1937년 5월 14일(음력)에 태어났지만 1938년 8월 18일에 출생 신고가 이뤄져 그날이 나의 공적 생일로 정착되었고 지금까지 그 가짜 생일을 지켜 왔다. 수십 년간 정직 운동을 했는데 80 평생 가짜생일을 지키고 있으니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에 태어난 아이들은 거의 절반이 한 돌 안에 죽었기 때문에 선친께서 1년을 기다리셨다가 그래도 죽지 않으니 출생신고를 하신 것이다. 내 동생들은 넷이나 돌 안에 죽었고, 그 죽음 하나하나가 어머니의 가슴에 멍이 되었으며 우리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오후반에 등교한 동생이 오전반에서 공부하던 나를 찾아와 “히야(형아), ○○가 죽었다”고 알려줬을 때 어린 가슴에 차올랐던 슬픔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무 일찍 죽음의 아픔을 경험한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초여름, 학교 수업을 마치고 혼자 가랑비를 맞으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아기를 업은 젊은 부인 하나가 들길에서 허둥대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토성동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고 물으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왜 우시느냐고 물었더니 등에 업은 아기가 아파서 병원이 있는 안강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아기가 방금 죽었다 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정신이 혼미해져서 방향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비가 억수로 내린 그 날 밤이 새도록 흐느껴 우셨다. 그 젊은 어미가 너무 불쌍하고 얼마 전에 죽은 동생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입도선매(立稻先賣)라 하여 벼 추수가 이뤄지기 전에 면사무소 직원이 논에 바로 와서 공출할 곡식 양을 결정하고 추수가 이뤄지면 즉시 빼앗아 갔으니 주민들이 굶는 것은 당연했다. 어렸기 때문에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소나무 껍질은 질겼고 칡뿌리는 쓰기가 짝이 없었다. 그런 굶주림은 일제 때뿐만 아니라 해방된 후 상당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거기다가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고 말라리아는 주기적으로 유행했다.

주린 데다 병까지 걸려도 병원은커녕 약도 없어서 살아남는 것이 기적이었다. 보릿고개에는 쪽박을 들고 밥 얻으러 오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없지 않았다. 모두가 부족했지만 아무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을 어느 집에도 대문이나 자물쇠가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도둑맞은 집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약력=1938년 출생,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철학박사,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한성학원 이사장,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 밀알복지재단 이사장, 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현 푸른아시아 이사장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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