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동백꽃 진다
꽃소식이 휴전선을 넘어 북상할 즈음 제주의 동백은 선혈의 꽃잎을 떨군다. 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 작별하는 것이 아니다. 강요배 화백의 그림 ‘동백꽃 지다’에는 숲속 학살 장면에 고개를 꺾은 동백꽃이 처연하다. 뚝 떨어지기 직전 다시 필 것을 기약하는 듯한 그 꽃잎엔 어떤 언어와 수사(修辭)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2차 대전 후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genocide)의 서막이었다. ‘제주 4·3’을 두고 여전히 이념적 핏대를 올리는 정치권의 치열한 공방전이 동백꽃 속살에 닿지 않은 채 세월은 흘렀다.
동백은 문명의 환희와 야만의 비애를 동시에 피우는 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선홍색의 인생을 꿈꾼다. 1945년 여름, 해방을 맞은 제주 주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문명에 감춰진 야만이 발톱을 드러내면 그 꿈은 느닷없이 낙하해 애틋한 사람들과 작별해야 하는 운명을 맞는다. 세파에 흔들리는 민초들은 그 운명을 하소연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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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와류 속 제주 4·3 대량 학살
전후 세계 휩쓴 인류 비극의 서막
좌우파 이념 공방에 가려진 야만
일상 속 독단과 매도에 어른거려
」
해방 정국이 와류(渦流)였듯 제주 4·3의 발단은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는다. 자치 보안대와 치안대, 건준(建準)의 인민위원회, 좌익의 통일전선인 민전(民戰)이 생필품과 식량문제를 두고 미군정과 대립했다. 6만에 달하는 징병·징용자가 돌아오자 섬 인구가 30% 증가했고, 송전과 교역 제한, 생산시설 마비로 경제가 파탄 지경이었다. 감자 한 톨이 아쉬운데 콜레라와 광견병이 덮쳤다. 남로당의 촉각이 이걸 놓칠 리 없었다. 1947년 3·1절 기념시위에서 기마경관의 말에 치여 어린애가 죽었다. 분노한 군중에 경찰은 발포로 응했다. 12명이 죽거나 다쳤다.
유혈사태의 시작이었다.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를 무작정 ‘붉은 섬’으로 규정했다. 1년간 검거 선풍에 2500여명이 검속됐고 400여명은 군정재판에 넘겨졌다. 남로당은 격앙된 민심에 불을 붙였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유혈의 제주도’. 1948년 4·3 사태 취재차 제주 부두에 내린 조선통신특파원 조덕송 기자는 당시의 공포를 이렇게 전한다. “오후 8시, 사태를 모르고 우는 애상적인 물새 소리가 처량하다.” 그 감상도 잠시, “시내에서 터져 나오는 총성은 온몸을 경직게 하고, 같은 배로 파견된 100명 응원경찰대에게 내려진 최후 훈시는 비장한 각오를 새롭게 한다.” 응원경찰대는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군정 경찰을 독려해 350여 명 남로당 무장대, 그들에 휩쓸린 주민, 무서워 피신한 사람들의 절멸 작전에 나섰다.
중산간 지역 소개령이 발령된 1948년 10월 중순, 토벌대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에서 5㎞ 한계선을 그었다. 내려오면 살고 올라가면 죽는다는 포고령이었다. 어떡할까. 올라가도 죽고 내려가도 죽을 텐데. 아비와 어미들은 자식과 세간살이를 짊어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한라산이 내준 동굴이 그나마 안식처였을 거다. 폭도와 은신자로 규정되는 순간이었다. 추위와 기근을 못 이겨 하산했을 때에는 폭도혐의자, 반동분자가 됐다. 군정경찰은 청년 아들이 사라진 도피자 가족을 해변으로 끌고 갔다. 무고한 생명, 대살(代殺)이었다.
그저 목숨 부지를 바랐던 사람들, 조천면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이 학살당했고 민가는 방화로 소실됐다. 대정면 상모리에서 48명이 생매장됐다. 무장대와 토벌대의 공방전에서 1954년까지 희생된 사람은 무려 2만5000~3만여 명. 제주는 격동기의 비극을 한 몸에 앓았다. 1949년 작성된 ‘제주 수형자’ 명단에는 3000여 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그들은 목포·광주·대구·서울·부산 감옥에 수용됐다가 6·25가 발발하자 재판 없이 총살됐다. 그들의 넋은 4·3평화공원 행불자 추모공원에 잠들어 있다. 3884명의 영혼을 접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학살은 유족들에겐 평생 원한이다. 삶을 찌르는 비수다. 소설가 한승원의 고향은 전남 장흥군, 거기에 남로당 당원 할아버지를 둔 한 남자의 얘기를 끄집어냈다. 장흥군 유치면은 조선의 모스크바였다. 지금은 댐으로 물에 잠긴 유치면 옛집에 조부를 묻고 서울로 상경해 막일과 술로 세월을 보내던 주인공의 아버지는 전망대에서 주저앉았다. 한승원의 소설 『물에 잠긴 아버지』는 해변, 운동장, 동굴에서 스러진 제주 아비와 어미들의 비화와 겹친다.
한승원의 딸 한강이 소설을 썼다. 『작별하지 않는다』.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주인공 경하는 작가의 분신, 광주항쟁의 트라우마를 결코 씻지 못한다. 그 선연한 악몽의 갈퀴가 일상을 긁어댄다. 그녀의 친구 인선은 제주 출신 다큐멘터리 작가다. 인선의 어머니는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돼 뭍으로 끌려간 남편을 끝내 찾지 못하고 죽었다. 인선은 어머니의 한을 다큐멘터리에 담고 싶다. 인선이 그 프로젝트의 제목을 경하에게 묻는다. 경하가 답한다. 작별해지지 않는, 작별하지 못하는, 『작별하지 않는다』. 좌우파 책임 공방에 가려진 야만의 얼굴은 우리의 일상 속에 여전하다. 오늘도 동백꽃 진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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