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대입'으로 잡겠단 정부의 아주 큰 착각
[서부원 기자]
▲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12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한 뒤 브리핑실을 떠나고 있다. 윤희근 경찰청장과 이노공 법무부차관이 배석하고 있다. |
ⓒ 권우성 |
지난 12일 정부는 이른바 '정순신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학교폭력 근절 종합 대책을 내놓았다.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적시해 대학입시에 반영하겠다는 게 골자다. 비교과 영역을 다루는 학생부종합전형은 물론, 수능 위주의 정시 전형에서도 적용되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학교 현장의 반응은 일단 호의적이다. 기실 지금까지 학교폭력 사안은 대입 전형 과정에서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든 검사 출신 정순신 변호사 부자지간의 '막장' 행태 정도가 아니라면, 웬만한 학교폭력은 학교 울타리를 넘기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학교폭력 사실을 학생부에 기록한다는 징벌 조항도 여태껏 '종이호랑이'일 뿐이었다. 강제 전학이나 퇴학 조치가 결정될 만큼 심각한 사안이 아니라면, 학생부에 기록하나 마나다. 사회봉사나 특별교육, 출석 정지, 학급 교체 등의 처벌에 대해선 학교의 심의를 거치지만, 대부분 어렵지 않게 삭제 처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순신 아들이 전학을 간 고등학교 역시, 구체적인 학폭 내용을 모르고 삭제 심의를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논란이 됐다(이번 대책에 따르면, 앞으로 삭제 심의 과정에 반드시 피해 학생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관계회복 전문가 참여 하에 가해학생의 진정한 반성 정도와 행정심판·소송 진행 여부도 반드시 반영하도록 했다. - 편집자 말).
일부 교사들 사이에선 이런 상황을 지적하며 뭐하러 복잡한 절차를 거쳐 기록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교육을 통해 시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기록한 학생부에 '빨간 줄'을 긋는다는 건 학교의 역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주장이다.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가혹한 처사라는 이야기도 뒤따른다.
사실을 기록하되 졸업과 동시에 삭제하도록 한 현행 방식은 상반된 두 주장 사이의 타협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정순신 사태'를 통해서 절감했듯이 어설픈 타협은 게도 구럭도 모두 잃게 된다는 교훈을 깨닫게 해주었다. 선의로 만든 제도를 전문적인 법 지식을 활용해 악용하는 고위공직자가 적지 않다는 걸 온 국민이 알아버렸다.
학교폭력 대책을 두고 현장에서 나온 '웃픈' 이야기
이제 학교폭력 사안은 학생부에 주홍글씨로 남아 대입의 당락을 결정짓는 열쇠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소송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육의 몫이 순식간에 사법의 영역으로 옮겨져 학교폭력 전문 변호사들이 '대목'을 맞게 될 거라는 우울한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가 14일 오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열린 정순신 자녀 학교폭력 진상조사 및 재발 방지대책 수립을 위한 청문회에도 불출석해 자리가 비어 있다. |
ⓒ 남소연 |
담임교사들 사이에선 차라리 잘 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교실에서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하면, 가해자와 피해자는 물론, 그들의 부모들까지 불러 상담하고 중재하는 일이 교사로서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자칫 한쪽을 편들었다간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다짜고짜 학교폭력의 원인과 책임을 담임교사의 학급 관리 부실로 몰아가는 학부모도 있다.
사안의 경중을 떠나 이젠 교실에서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곧장 학교폭력 심의기구에 넘겨버리면 끝 아니냐고 반기는 이들이 많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선 학교마다 학교폭력 전담 변호사를 상주시켜 즉시 대응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심지어 학교폭력 전담 변호사에게 학생부장 업무를 맡기자는 '웃픈' 이야기도 이어진다.
근본적 고민이 빠져 있는 정부의 대책
그런데, 학교폭력에 연루되면 원하는 대학에 못 간다는 식의 정부의 대책에는 근본적인 고민이 빠져 있다.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일정 부분 효과가 있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대증요법'일 뿐이다. 속된 말로 '약발'이 떨어지면, 마치 항생제의 내성처럼 더욱더 강력한 처벌 조항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다.
한 동료 교사는 경각심만으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대입을 학교폭력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건, 정부의 정책적 사고 역량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꼬집었다. 학업에 대한 누적된 스트레스가 학교폭력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성적이 상위권이든 하위권이든 학업 스트레스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최상위권의 경우엔 상시적 불안이, '수포자(수학 포기자)'와 '대포자(대학 포기자)'로 호명되는 하위권의 경우엔 추락한 자존감이 학교폭력에 휩쓸리도록 끊임없이 자극한다. 학교마다 학교폭력 예방대책으로 학업 스트레스를 떨칠 수 있는 체육활동과 동아리 활동을 권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학업 부담이 줄면 학교폭력도 자연스럽게 줄게 된다.
짝꿍이 대학의 '간판'을 놓고 겨루는 경쟁 상대가 아니라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라면, 그 사이에 학교폭력이 발붙일 공간은 없다. 끊임없이 성적을 비교하며 '너 죽고 나 살자'는 논리만 횡행하는 살벌한 교실에서 학교폭력은 필연적인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학벌 구조에 기댄 대입이 근본적인 원인인데, 대입을 수단 삼아 학교폭력을 해결하자는 건 심각한 모순이다.
'대증요법'은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치료법이 병행될 때라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번 대책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학벌 구조를 완화하고 대입의 영향력을 분산시키려는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학교를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의 정글처럼 만들어놓고선 아이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지내라고 말하는 건 기성세대의 언어도단이다.
▲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해 11월 17일 오전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한 수험생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 이희훈 |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겠느냐'고 눈을 흘길 테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대안이 있다. 예체능 교과의 수업 시수를 대폭 늘리는 것, 비교과 활동을 활성화하는 것, 내신 성적 1~2점에 목숨 거는 상대평가 방식을 절대평가로 바꾸는 게 우선 절실하다. 언뜻 학교폭력과 무관해 보일지언정 서열화를 부추기는 고교 다양화 정책을 재고하고 취업 원서에 대학명 기재를 금지하는 것, 지방대를 우선 지원하고 의치대 정원을 늘리는 게 근본적인 해법일 수 있다.
요컨대, 학교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의 본령을 회복해야 한다. 학교는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놀고 서로 도우며 공부하는 즐거운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학교가 오로지 대입을 위한 준비만 시키는 '집단 수용소'의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안타깝게도 대입에 불이익을 준다고 을러댄 이번 대책은 학교 교육을 대입에 더욱 종속시킬 게 불 보듯 환하다.
사족. 정부는 이번 학교폭력 근절 종합 대책을 두고 당사자인 학교 현장이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에 고무된 듯하다. 지금껏 분야를 막론하고 현 정부가 내놓은 대책의 십중팔구는 헛발질이었다.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는 어처구니없는 것도 적지 않았는데, 그나마 이번 대책은 미봉책 정도는 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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