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0만원 전세라서, 구제 받지 못했다…'건축왕' 세번째 비극

심석용 2023. 4. 1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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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열흘 전인 지난 7일 새벽 박씨는 미추홀구전세사기 피해자가 모인 단체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고 한다. “늦은 시간 퇴근하고 저도 인증합니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집이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스티커를 각자 집 앞에 붙이고 있었는데 박씨도 동참한 것이다. 사진 김병렬씨

“열흘 전 당찼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17일 인천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 앞. 이웃의 부고를 전하는 주민 김병렬(44)씨의 눈시울은 젖어있었다. 위층에 사는 박모(31)씨는 이날 오전 1시 20분쯤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됐다. 지인의 신고로 119구급대가 출동했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자택엔 손글씨로 적힌 유서가 놓여있었다.

사망 열흘 전인 지난 7일 새벽 박씨는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가 모인 단체 채팅방에 글을 올렸다. “늦은 시간 퇴근하고 저도 인증합니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집이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스티커를 각자 집 앞에 붙이고 있었는데 박씨가 동참한 것이다. 김씨가 기억하는 박씨의 모습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이른바 ‘건축왕’ 전세사기 피해자였던 박씨는 결국 스스로 삶을 내려놓았다.

미추홀구전세사기대책위원회(대책위)에 따르면 박씨는 2019년 9월 미추홀구 현 자택에 입주했다. 2017년 준공한 13층짜리 아파트였다. 계약 당시 7200만원이었던 전세금은 2년 뒤 2021년 90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한 번에 1800만원을 올린 임대인이 마뜩잖았지만 이사할 곳을 찾지 못한 박씨는 재계약을 택했다고 한다.

17일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31)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씨의 자택앞엔 '수도요금이 체납됐다'는 인천시상수도사업본부의 통지문이 붙어있었다. 심석용 기자

그러나 지난해 3월 29일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법원이 박씨의 집에 임의경매 개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박씨는 이른바 ‘건축왕’이라 불린 건축업자 남모씨가 설계한 조직적 전세사기의 피해자가 돼 있었다. 지난해 1월부터 박씨 집을 포함해 남씨가 실소유한 주택 690채가 차례로 경매에 넘겨졌다.

더 절망적인 건 집이 경매에서 낙찰돼도 박씨가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은 없었다는 점이다. 2017년 7월 근저당권이 설정된 박씨의 집은 전세보증금이 8000만원 이하일 경우에만 최우선변제금 2700만원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재계약 당시 전세보증금을 9000만원으로 올린 박씨는 구제대상에서 제외됐다.

박씨는 생계를 위해 회사일에 매진하면서도 대책위 활동을 놓지 않았다. 김병렬씨는 “박씨는 본업 때문에 많이 활동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등 늘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달 초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도 박씨는 “일단 버텨보자”며 김씨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고 한다.

그랬던 박씨가 17일 숨진 채 발견되면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술렁이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 임모(26)씨가 숨진 지 사흘 만에 전해진 비보라 충격이 더 컸다. 지난 2월 28일 전세사기 피해자 A씨(30대)는 휴대전화에 남긴 유서에 ‘(전세 사기 관련) 정부 대책이 굉장히 실망스럽고 더는 버티기 힘들다. 저의 이런 결정으로 이 문제를 꼭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하지만 정부가 뚜렷한 대책을 내놓기 전에 비극이 이어지면서 낙담한 피해자들이 늘었다고 한다. 김씨는 “힘들지만 다들 의지하고 함께 대응하자고 했는데 안타까운 소식이 이어지자 피해자 대부분이 큰 상심에 빠져있다”고 울먹였다.

17일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31)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씨의 자택앞엔 전세사기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심석용 기자

최근 김씨가 사는 아파트에선 60가구 중 20가구가 법원 경매에서 낙찰됐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이제 낙찰자들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병렬씨는 “제발 경매를 중지해달라”며 “낙찰이 되면 거리에 나앉아야 한다. 경매중지가 어려우면 경매권 우선순위라도…희망은 그것뿐이다”라고 말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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