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웃음을 찾은 사람
J씨는 태어나서 청년이 되기까지 지리산 자락에서 살았다.
그는 땅속의 아지랑이가 노릇노릇한 새순을 밀어 올릴 때부터 산의 모든 식물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등산객들은 하릴없이 야생화나 찾아다니는 팔자 늘어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문화의 혜택이 차단된 환경에서 자란 그에게 노동은 유일한 삶의 수단이며 방법이었다. 그에게 웃음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세상에는 어디에도 웃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난은 J씨 곁에서 떨어져 나갈 줄을 몰랐다. 지리산에서 떠나는 것은 곧 그의 소망이며 꿈이었다. 그에게는 농번기가 따로 없었다. 밤늦도록 지리산 아래 소도시에 박스 공장과 벽돌공장을 두루 다니면서 사람들과 눈 마주칠 시간도 없이 일했다. 오직 돈 벌어야 한다는 무서운 집념으로 앞만 보고 뛰었다. 이러한 삶의 연속으로 수십 년 만에 그는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지리산을 떠나기 위해 이사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자신의 손톱 밑이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종합검진 결과 혈액암 말기였다. 검은 그림자는 가혹한 그의 운명을 비웃으며 다가섰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한 분 모시고 장가들어 효도하며 살아보려는 야무진 꿈은 순식간에 절망의 깃발을 휘두르며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그토록 애써 모았던 재산은 마치 구멍 난 독에 물이 새어나가듯 모두 빠져나갔다. 나는 J씨를 남양주 요양병원에서 만났다. 그곳은 암환자들이 찾는 병원인데 십수 년 전 매 주일 그곳을 방문했었다. 그곳에서 유난히 표정이 밝은 한 남자를 소개받았는데. 그가 바로 J씨였다.
“지금은 저가 암환자가 아닙니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투병체험담을 차근차근히 들려주었다. “화가 나면 피가 거꾸로 선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제 몸속의 피는 늘 거꾸로 돌고 있었어요. 저는 이미 정신적인 암 환자였습니다.”
가끔 등산객들만 봐도 울화가 치밀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까지도 자신의 인생을 망쳐놓은 마의 절벽같이 느껴졌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나는 웃음을 모르고 살아온 어이없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래서 J씨는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닫혀있어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과 소통의 통로가 막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J씨가 방황할 때 어느 날 문득 그를 돕는 착한 이웃이 나타난 것이다. 그 부부는 J씨가 병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들은 자연치유요법으로 선교사들을 돕는 부부였다. 그 이웃의 헌신적인 사랑의 힘은 J 씨의 마음을 열었다. 식단도 신경 써서 포도즙과 현미밥을 먹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절망의 늪에서 J씨에게 생명의 길을 안내해준 천사부부였다. 티눈처럼 굳어진 암세포들은 그가 고마움과 감사를 표현할 때마다 시나브로 떨어져 나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증오심과 부정적 사고로 사물을 바라보던 그의 시각은 바뀌었다. 또한 암세포가 몸 밖에서 찾아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성장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지리산의 청청한 햇빛, 신선한 물, 깨끗한 공기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오랜 세월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의 순간이었다고 하였다. 이젠 물소리와 바람 소리, 풀벌레의 소리까지 다 천상의 노랫소리로 자신의 가슴을 출렁이게 한다는 고백을 들었다.
J씨의 마음에 소생한 새로운 생명의 소리는 찬란한 햇빛과 함께 아직 청춘이 구만리 같은 그 청년의 가슴에 새로운 사랑으로 찾아온 것이다. 값없이 누려온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한몫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와 사랑이었을 것이다.
암은 생명을 공격하고 생명 세포를 모두 죽이고 함께 죽는 자살 테러범이 아닐까 생각한다. J 씨는 7년 만에 혈액암에서 완치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의 원흉이 증오심과 분노였다는 것도 깨달은 그는 웃음을 찾았다. J 씨는 싱글벙글해서 과거에 암을 알았던 환자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 손을 좀 보세요. 검은색이던 손톱 발톱이 예전의 건강한 색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는 악몽 같은 지난날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생명 세포들이 좋아하는 신선한 식생활을 길들이고 아름다운 일과 보람찬 추억만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간다고 하였다.
“지금은 병 때문에 요양원에 온 것이 아니에요. 애써 모은 돈 다 없애고 투병 중에 이곳에서 많은 은혜를 입었답니다.” 주변에 많은 암 환자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어떤 불치의 병이 자신의 몸속에 자리를 펴지 못하도록 먼저 미움과 분노를 몰아내십시오.”
“이제는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라는 아름다운 말을 남겼다. 자연에 대한 감사와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용서와 평화로운 마음이 은혜임을 깨달은 J 청년의 삶이 빛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울타리콩>
죽은 줄 알았다
어쩌다 두엄에 갇히었나
가여운 씨앗 하나,
캄캄한 절망 밀어내고
쏘옥 고개 내민 씨앗
죽어버린 줄 알았다
녹아버린 줄 알았다
다시 살아나는 것
거름더미 속의 푸른 기적,
형체 사라지고 뭉개져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묘한 향기 속,
태초로부터 이어온
치열한 생명의 줄기
온 울타리를 푸르게 뒤덮었다
생의 미학을 열매로 보이는
나를 닮은 울타리콩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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