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변 원주 폐사지 답사의 마지막

운민 2023. 4. 1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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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별곡] 원주 3편, 거돈사 터와 망국의 임금 경순왕

[운민 기자]

지금까지 원주 섬강, 남한강변에 있는 흥법사지와 법천사지를 둘러보았다. 이 고장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 발자취가 만만치 않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특히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부론면 일대 천하의 명작인 지광국사 현묘탑을 품고 있었던 법천사터는 물론, 이번에 찾아갈 거돈사 터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기로 유명하다.

거돈사는 법천사에서 황학산 자락을 마주 보고 있는 지근거리이기에 함께 둘러보기 편하다. 두 절의 첫인상은 다르게 다가온다. 법천사가 너른 터 넓은 벌판을 포근하게 품은 듯한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다면 거돈사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맞이하는 소개팅 상대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어색했던 공기가 사라지고 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 거돈사지 삼층석탑 신라하대에 지어진 거돈사지 삼층석탑은 단아함을 자랑한다.
ⓒ 운민
 
거돈사지는 진입로 대신 다듬어진 축대 위로 올라가면 바로 만날 수 있다. 말끔하게 생긴 삼층석탑이 우리를 맞이해 주고 그 뒤편으로 금당, 승방, 화랑터가 반듯하게 이어져 있다. 거돈사는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 경에 지어져 고려시대에 한 인물로 인해 크게 중창되었다. 그가 바로 원공국사 지종대사다.

그는 광종으로부터 대사의 법계를 받았으며 목종, 현종 등의 총애를 받으며 왕사가 된 인물이다. 그가 개경을 떠나 말년을 보냈던 곳이 바로 거돈사지다. 그런 만큼 원공국사의 승탑과 탑비가 모두 거돈사에 자리했다.

하지만 법천사와 마찬가지로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탑도 역시 일제 강점기 당시 밀반출되어 이곳저곳을 떠도는 운명이 되었다. 일본 사람의 집을 거쳐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진 승탑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 원공국사 승탑 거돈사지 뒷편에 자리한 원공국사 승탑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한다. 옛 터에는 새롭게 지어진 승탑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운민
 
원래 승탑이 자리한 곳은 거돈사를 조망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이었다. 현재는 답사객들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보고자 새롭게 승탑을 재현하여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공국사의 탑비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거돈사지의 입구에 자리한 그의 탑비는 위상만큼이나마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을 하고 있고, 특히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려 현종 16년(1025년)에 세워진 이 탑비는 당시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이 직접 글을 지은 것이라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거돈사는 법천사에 비하면 사세는 크지 않은 편이지만 유물이나 역사적 가치는 그 못지않다.     
 
▲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는 화려함으로 유명하다.
ⓒ 운민
 
다만 법천사의 화려한 유물전시관과 달리 거돈사는 허름한 분교건물을 활용한 유적센터에서 이 절터의 옛 모습을 흑백사진 자료로 보여주고 있었다. 탑과 민가의 지붕이 서로 맞닿아 있을 정도로 거돈사는 현재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랐다. 다만 천년을 자랑하는 느티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아늑한 이 절터를 마지막으로 남한강변의 원주 폐사지 답사는 마무리하기로 한다.
     
원주는 지금도 어느 고장으로도 사통팔달로 통하고 있지만 고대, 중세에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후삼국시대에는 왕건과 견훤이 건등산과 견훤산성에서 나라의 명운을 걸고 진검승부를 벌였을 정도다.

왕건은 940년 이곳이 지명을 북원경에서 "지역이 개활(開闊)되어 넓은 들판"이란 뜻으로 원주로 고장의 명칭을 정한 이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문막, 부론에서 충주 방향으로 가다 보면 귀한 분이 내려왔다는 뜻의 귀래(貴來)라는 지명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는 이곳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신라 경순왕과 관련된 흔적들이 더러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43년간 이곳에 머물며 미륵산에 미륵불을 조성하면서 용화세계가 도래하기를 기원했다는 것이다. 그 산으로 가는 초입에는 경순왕을 모신 사당 경천묘가 남아 있다.     
 
▲ 경천묘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경천묘일대에는 그와 관련된 많은 설화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운민
 
3칸의 작은 규모로 산의 경사면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 경천묘는 나름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사당 문이 굳게 닫혀 안으로 들어가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주말에는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는 하지만 날씨가 궂은 날에는 닫혀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대문에 적혀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면 열어주시기도 한다고 하니 참고 바란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비록 망국의 왕이지만 꽤 괜찮은 말년을 보냈다. 왕건의 딸과 결혼해 부마가 되었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면서 왕다음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연천에 자리한 경순왕릉의 설화(경기별곡 연천편 참고)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조정에 의한 견제와 감시는 만만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경순왕이 죽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여전히 많았고, 그들은 원주 미륵산 아래 고자암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받들어 영정각이라 불리는 전각을 세웠다. 이 전각은 고려 중기에 무너졌지만 조선왕조 후기에 경순왕의 후손들인 경주 김씨들을 중심으로 연천의 경순왕릉을 찾고 사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영조가 직접 영정각의 명칭을 하사하니 지금의 경천묘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의 사당 건물은 2006년에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이 장소에 깃든 이야기는 유구하다.     
▲ 반계리 은행나무 반계리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 중 하나다. 가을에는 노랗게 단풍이 물드는 장관을 연출한다.
ⓒ 운민
 
문막일대의 마지막 발걸음은 반계리 은행나무로 이어진다. 가을철이 아니라 샛노랗게 물드는 장관을 볼 수 없었지만 높이 32미터에 둘레 16미터의 장엄한 모습은 그 아쉬움을 달래기 충분하다.

이곳의 은행나무는 용문사와 함께 1000년을 우뚝 솟은 오래된 나무로 유명하고 신이 깃든 신목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에 이 나무가 샛노랗게 단풍이 한꺼번에 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번 가을에 온 세상이 진하게 피어오르기를 기대하며 문막일대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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