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검찰 수사의 ‘협조자’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검찰에 협조한 걸 감안해 구속만은….”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 조카 장시호씨는 ‘국정농단’ 사건 특검팀의 ‘복덩이’로 불렸다. 2017년 12월 1심 법원이 장씨에게 검찰 구형보다 1년 많은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하자 재판정은 술렁였다. 장씨 호소에도 재판부는 “진실 규명에 협조했지만 죄가 무겁다”고 했다. 법원이 검찰의 ‘플리바게닝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플리바게닝은 유죄를 인정하거나 수사에 협조한 인물의 형벌을 낮춰주는 제도를 뜻한다. 미국에서는 형사 사건 95%가 플리바게닝으로 재판 없이 종결된다. 한국에선 현행법상 허용되지 않지만 검찰이 암묵적으로 플리바게닝을 활용한다는 평가가 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죄를 기소하거나, 추가 기소를 하지 않거나, 구형을 적게 하는 식의 재량이 있어서다.
최근 ‘대장동 재판’에서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의 변심 경위가 주목받는다. 유씨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측근들에 대해 불리한 진술을 쏟아낸다. 민주당은 검찰 회유를 의심한다. 유씨는 배신감과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재판에서 재판장은 유씨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구속 연장이 안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한 번이라도 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제가 바보도 아니고 한국에 플리바게닝은 없지 않으냐”고 답했다.
검찰은 최근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수사에 착수했는데, 돈봉투 전달에 관여한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 1심 선고에서도 눈길을 끄는 일이 있었다. 검찰은 정치자금 등 10억여원 수수 혐의를 받는 이씨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는데 법원은 지난 12일 징역 4년6개월을 선고했다. 일각에선 이씨가 돈봉투 수사에 협조해 검찰이 구형을 낮춘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검찰은 “기준에 맞춰 구형했다”는 입장이다.
‘플리바게닝은 없다’는 게 검찰 공식 입장이지만 검찰은 여러 차례 제도 도입을 시도해 왔다. 부패 강력 범죄 수사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이다. 플리바게닝이 있었다면 대장동 사건 수사가 더 신속히 진행됐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아무리 과학 수사가 발전해도 증거물의 전후 맥락을 꿰맞추는 건 핵심 내부자의 ‘입’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이득에 따라 행동하는데 입을 열든 말든 처벌 수위에 별 차이가 없다면 진실 고백의 동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플리바게닝은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 도입돼 있지만 한국에선 번번이 입법에 실패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해 12월 도입 필요성을 재차 언급했고 대검찰청은 지난달 ‘형사법 아카데미’를 열고 공론화에 나섰다. 하지만 법안이 제출돼도 민주당이 합의할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검찰이 범죄자와 협상하는 게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 허위 진술 유도 우려 등도 일리가 있다. 검찰은 지난 30년 동안 수사권이 약화되기만 했다고 강조하지만 ‘절제되고 공정한 수사’를 요구하는 국민 목소리가 계속되는 현실도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만 검찰 수사 권한의 강화를 무조건 금기시하는 것도 합리적 시각은 아닌 것 같다. 과거 한 민주당 의원은 장시호씨의 법정구속에 “검찰에 협조하면 오히려 피해가 크다는 시그널”이라며 법원을 비판했었다. 검찰 수사에 협조했으니 감형해줘야 한다는 논리인데 이 대표 사건에서도 같은 입장일지 궁금하다. 플리바게닝과 같은 형사 절차 논의는 정치적 유불리나 ‘내 편, 네 편’을 떠나 어떤 방식이 국민에게 도움 되는지가 최우선 고려 대상이어야 한다. 플리바게닝에 법원 공개심리 등을 거치게 하면 ‘암시장의 거래’를 ‘규제받는 공개시장’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순기능도 있다. 정치 편향 문제가 걱정이라면 적어도 국민 일상을 위협하는 마약 조폭 범죄만이라도 제도를 제한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논의해보면 어떨까.
나성원 사회부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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