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천하… “MVP는 끝이 아닌 시작”

이누리 2023. 4. 17.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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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 16년차 여자 농구선수 김단비
우리은행 김단비가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한국여자농구연맹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프로 16년 차 농구선수 김단비(33·우리은행). 올 시즌 공수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활약한 끝에 이적 첫 해 만에 우리은행을 통합우승 왕좌에 올려놨다.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 석권도 모자라 블록상, 우수수비선수상, 윤덕주상(최고 공헌도), BEST5까지 6관왕에 올랐다. 데뷔 초부터 ‘에이스’ 수식어를 달고 살며 상이란 상은 다 받아본 김단비지만 MVP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른을 넘은 고참급 나이에도 기량은 여전하다. 올 시즌 17.17점(2위) 8.77리바운드(5위), 6.1어시스트(2위), 1.53스틸(3위), 1.3블록슛(1위) 전 스탯 고른 성적을 거뒀다. 체력도 전성기 못지않다. 팀 내 유일하게 전 경기 출전해 경기당 평균 31분55초를 뛰었다.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에서 만난 김단비에게 정상에 선 소감을 물었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손사래부터 친 그는 “MVP를 받았다고 끝난 게 아니다”라고 입을 뗐다. ‘전성기’라는 말도 “이 나이에 듣기엔 낯간지럽다”고 했다. 선수라면 모두 바랄 만한 대기록을 세워놓고도 띄우는 말엔 좀처럼 긍정을 않는다. 아직 이룰 목표도, 해내고 싶은 욕심도 많아서다.

김단비의 농구 철학은 ‘일희일비’와 거리가 멀다. 그토록 바랐던 MVP를 손에 넣었지만 “이 순간도 결국 한때”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는 “MVP도, ‘연봉퀸’이라는 타이틀도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했다. MVP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았던 게 아니다. 한때는 ‘받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괴로웠을 정도로 오랜 기간 기다려왔던 상이다. 김단비는 “아직 스스로 엄청 뛰어나다는 생각은 안 든다”며 “MVP 다음이 더 중요하다”고 전했다.

매사에 ‘다음’을 고려하는 습관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모두 겪어본 경험에서 나왔다. 내내 탄탄대로였을 것만 같은 김단비의 선수생활에도 나름대로 굴곡이 있었다. 그는 그간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며 ‘터닝포인트’로 두 번의 순간을 꼽았다. 프로 데뷔 3년 차에 퓨처스리그(2군) 5관왕에 올랐을 때, 그리고 2018-2019시즌 당시 소속팀 신한은행이 정규리그 꼴찌로 추락했을 때다.

2009년 김단비의 친정팀 신한은행은 그야말로 무서울 게 없었다. 전주원, 정선민, 최윤아 등 ‘레전드’ 선수들을 앞세워 통합우승에 퓨처스리그 우승까지 차지했다. 잔뼈 굵은 선배들 틈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단비는 퓨처스리그 5개 부문을 석권한 뒤 다음 시즌부터 식스맨으로 발돋움했다. 김단비는 14년 전 옛 기억을 떠올리곤 “그때가 저한테는 제일 큰 성장의 순간”이라고 웃어보였다.

성장의 순간 만큼이나 좌절의 순간도 흔적을 크게 남겼다. 김단비는 곧바로 2018-2019시즌을 떠올렸다. 상위권을 놓치지 않던 신한은행이 정규리그 꼴찌로 주저앉았을 때다. “우승도 해보고 항상 상위권에 있다가 성적이 뚝 떨어지자 충격이 컸어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랄까. 뭔가 번쩍하면서 다시 정신 차리는 계기가 됐어요.”

팀의 부진은 선수를 위축시켰다. “지는 것도 습관이 되더라고요. 자신감도 떨어지고 이기는 법을 잊게 됐어요. 다음 시즌도 영향이 없지는 않았고요. 게임에 나가서도 ‘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먼저 하게 됐어요.”

승리가 당연했던 김단비에게 이 시기는 담금질의 시간이 됐다. 그는 꼴찌를 경험한 후 게임에 나갈 때면 ‘한 경기도 이기는 건 참 힘든 것’이라고 되뇌곤 했다. 하지만 ‘지더라도 다음 게임에서 이기면 된다’고 생각을 바꿔보려고 조금씩 노력했다고 한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기보다 다음 일을 준비하게 됐죠. 실수하면 다시 도전하고, 또 실수하면 또 도전하면 된다는 걸 배웠어요.”

인터뷰에 앞서 우리은행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올 시즌 신한은행에서 우리은행으로 이적한 김단비는 팀을 통합우승으로 이끌었고,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를 석권했다. 권현구 기자


“데뷔 후 초반에는 1승에 대한 행복감을 온전히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아요. 경기만 나가면 이기니까. 그런데 꼴찌를 하고 나서는 한 게임 한 게임의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이번 시즌에서도 비슷한 마음가짐이었어요. 힘이 들다가도 ‘최하위권에 있을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달래며 임해왔어요.”

물론 순간을 느낄 새 없이 경기에 온전히 몰입하는 김단비도 경기 중 힘에 부칠 때가 있다. 그는 “힘들 때마다 ‘기본기’로 돌아간다”고 했다. 기본기는 한마디로 ‘궂은 일’이다. 김단비가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에게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이다. “어렸을 때부터 감독님께선 다른 궂은 일부터 먼저 하라고 하셨어요. 감독님이랑 같은 팀에 있지 않을 때도 농구가 안 될 때면 감독님 말씀대로 기본으로 돌아갔어요.”

골을 잘 넣는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마련이지만 농구는 어디까지나 팀 스포츠다. 김단비는 “혼자 잘한다고 이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며 “코트 위에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격은 기복이 있어요. 컨디션에 따라 슛이 잘 들어가는 날이 있고 안 들어가는 날이 있거든요. 그러면 다른 부분을 채우면 돼요. 공격이 안 되더라도 수비를 할 수 있고 리바운드도 할 수 있고 어시스트도 할 수 있는 거죠. 그건 제 의지에 달렸어요. 하기 싫어 대충 하지 않는 이상 그동안 연습만 한 만큼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래서인지 궂은 일을 잘 해내는 동료들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단비다. 그는 지난달 6일 열린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마이크 앞에 설 때마다 “동료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올 시즌 코트 위에서 합을 맞췄던 박혜진, 김정은, 박지현 외에도 식스맨으로 잠재력을 터뜨렸던 후배 선수들을 언급에서 빼놓지 않는 이유다.

후배들의 성장세에 자극을 받을 때도 있다. 한 팀의 에이스로 오래 뛰다 보니 이름에 걸맞는 플레이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알게 모르게 자신을 짓눌렀다. 김단비는 선수생활에 가장 큰 장애물로 ‘안일함과 자만심’을 꼽았다. “‘적은 내 자신’이라는 말 있잖아요. 닭살 돋는 말이지만 저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적을 결심하게 된 계기이기도 해요. 한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까 그 편안함을 너무 익숙하게 여겼고 ‘이 정도만 해도 되지’라는 생각에 더 나아가지 못했던 순간이 너무 많았어요.”

담담히 말했지만 데뷔 때부터 15년을 함께한 친정팀을 떠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김단비는 “‘프랜차이즈로 남을 수 있는데 왜 고생을 하러 가냐’는 말이 유독 마음에 와 박혔다”고 했다. “신한에서 옮길 때 반신반의 했어요. 팀을 응원하는 팬도 있었으니 욕 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걱정과 달리 응원을 보내준 분들이 훨씬 많았어요. 너무 든든했죠. 잘한 선택이라고 믿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팬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김단비의 다음 목표는 뭘까. 그는 “부상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드리며 은퇴하는 게 현재로선 가장 큰 목표”라고 말했다. “내려가는 속도를 최대한 늦춰보겠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선 조건이 하나 있다. 단순하지만 김단비에겐 큰 원칙이다. 그는 “행복한 농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 모토로도 삼고 있는 건데, 그냥 농구를 즐기고 싶어요. 나중에 은퇴했을 때 이 순간이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거든요.”

‘행복한 농구’를 향한 김단비의 여정은 다음 시즌에도 계속된다. 다가올 시즌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할지 물었더니 “올 시즌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MVP까지 받았는데 다른 점이 없겠느냐고 되물어도 “이제는 지난 시즌”이라며 선을 긋는다. 말을 맺으며 김단비는 다시 한번 눈을 반짝였다. “똑같은 마음으로 다시 처음부터 준비를 해야겠죠.”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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