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미국은 600년, 우리는 50년?
평소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가족들에 편승해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를 주말 이틀 만에 정주행했다. 치밀한 극본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중첩된 복선과 마침내 이뤄지는 완성된 복수에 이르기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언론을 통해서도 뛰어난 작품에 대한 찬사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잔혹한 응보 방식의 복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었다. 정상적인 사법 절차에 의한 처벌만으로는 시청자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까닭일까. 그렇다고 이런 극단적인 응보가 우리 대중이 원하는 처벌 방식은 아니리라.
전국 법원에서 이뤄지는 많은 재판이 기사화돼 대중에게 알려진다. 가십거리에 불과한 사건도 있지만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있는 중요 사건도 존재한다. 국민의 공분을 사는 주요 범죄 사건에 관한 언론 기사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해당 범죄자들에 대한 양형이 너무 낮다는 시민 여론이 소개된다. 음주운전에 대한 강력한 처벌 요구도, 촉법소년 제도에 대한 폐지 주장도 모두 같은 맥락에 있다. 과연 우리 법원의 양형은 외국에 비해 너무 낮은 수준에 있는 것일까. 형량을 올리면 그런 범죄는 자취를 감추게 할 수 있을까.
미국 법원이 어느 중범죄자에게 징역 600년을 선고했다는 판결 소식을 담은 기사에 폭발적인 댓글이 달린다. 수백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은 해당 국가가 개별 범죄의 법정형을 합산해 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일 뿐(우리나라는 가장 무거운 형에 2분의 1을 가중하도록 한다), 100년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터넷 댓글에서 강력한 처벌로 자주 언급되는 미국의 주요 사건 범죄율은 우리나라에 비해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 여론은 실제로 입법을 통해 재판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08년 일어난 참혹한 어린이 대상 성폭력 사건의 수사 및 재판 결과가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기대에 비해 낮은 양형, 불명확한 적용 법조, 음주를 이유로 한 심신미약 감경 등의 문제가 제기됐다. 대중은 분노했다. 국회는 유기징역형 상한을 15년에서 30년으로 늘렸고, 최대한 50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해당 유형의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도 적용되지 않게 됐다.
음주를 이유로 한 심신미약 주장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몇몇 특별법은 음주나 약물을 이유로 한 심신미약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도록 명시적으로 규정했고, 재판 실무에서도 음주 습관이 있는 사람이 자제하지 못하고 음주를 한 것도 모자라 범죄에까지 이르렀다면 더 엄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지고 있다(작량감경은 구체적으로 타당한 양형을 위해 꼭 필요한 제도이니 문제 삼지 말자. 반성문은 해당 피고인을 전인격적으로 판단하는데 참고하는 자료일 뿐 그것으로 감형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은, 대중은 언제나 엄벌만을 요구하고 있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양형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은 실제 재판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면 처음 사건 개요만 접했을 때보다 훨씬 적은 형량을 선택하고, 대부분은 실제 법원이 선고한 형보다 더 관대한 형을 선택했다고 한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이래 국민은 대체로 직업 법관들보다 증명의 정도를 더 엄격하게 평가하고 있다(10년간 국민참여재판 무죄율은 10%를 웃돌았다). 법관들이라면 채택하기 어려울 관대한 양형을 선택함에 주저함이 없다. 항소심에 이르러 국민참여재판의 무죄가 유죄로 바뀌고, 양형도 상향되는 사례들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이런 운영 양상은 도입 초기 국민참여재판을 둘러싼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법관의 재판과 양형은 기사에 언급된 단편적인 사항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법관은 적게도 수천 쪽, 많게는 수십만 쪽에 이르는 기록을 검토하고 다양한 선례와 법리를 참고해 오랜 시간 고민한 다음 결론을 내린다. 덴마크의 토어번 멜치어 대법원장은 필자에게 재판에 대한 오해는 불충분한 정보 제공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사법부 재판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위해서는 재판에 대한 정보를 대중과 폭넓게 공유해 오해의 소지를 없앨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창영 법무법인 해광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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