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DJ의 현실 외교, 용산과 민주당에 돌직구를 던지다[서승욱 논설위원이 간다]
DJ를 키운 목포에서 김대중-오부치를 추적하다
'제15대 대통령 후광(後廣) 김대중 선생 출신학교'
지난 8일 58회 졸업생들이 증정했다는 비석이 학교 정문 앞에서 방문객을 맞았다. 전남 목포시 용당동 목상고등학교, 과거엔 목포공립상업학교나 목포상고로 불렸다. 학교 곳곳에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숨결이 느껴졌다. 정문 주변 '김대중 동산'엔 '행동하는 양심'이라 새겨진 전신 조형물이 서 있었다. 그 좌우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최후 진술'과 '김대중 대통령 어록' 등 키 작은 비석들이 섰다. 본관 건물 앞엔 대통령 재임 때인 1999년 직접 쓴 '홍익인간(弘益人間)' 비문이 남아있다.
목포행 재촉한 이종찬의 한마디
1924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DJ는 초등학생 시절인 1936년 목포로 이사했다. 1939년 당시 5년제였던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해 1943년 전시특별조치로 조기 졸업했다.
목포는 도시 전체가 DJ와 함께한다. 그가 소년·청년 시절을 보냈고, 국회의원에 두 번 당선된 정치적 고향이다. DJ 가족이 정착했던 만호동 집터엔 '소년 김대중 공부방'이 재현돼 있다. 산정동엔 그의 일생을 추적한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있다. 이런 곳들보다 먼저 학교를 찾은 건 얼마 전 인터뷰했던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의 말이 귀에 박혔기 때문이다. "1998년 국빈 방일의 압권은 과거 스승을 만난 DJ의 모습이었다. 목상(목포상고)의 일본인 선생님을 만나 '내가 바로 도요타'라고 했다. DJ의 일본어 성이 도요타란 걸 나도 처음 알았다. 이런 DJ의 태도에 일본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일본인 은사에 "도요타입니다"
현재 한국 외교는 돌풍 속에 있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외교를 놓고 정치권과 국민들이 반으로 쪼개졌다. 양측이 사생결단식으로 맞붙는 이 시점에 과거 DJ가 보여 준 용기 있는 대일 외교가 여야 모두에 주는 시사점이 작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목포행 열차에 올랐다.
이 전 원장이 말한 DJ의 국빈 방일은 취임 뒤 7개월이 지난 1998년 10월 7일부터 10일까지였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함께 양국 관계의 두 이정표로 꼽히는 'DJ-오부치 선언(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탄생한 그 출장길이다. DJ는 목포상업 재학 시절의 무쿠모토 이사부로(椋本伊三郞)은사를 59년 만에 영빈관에서 만났다. 80세 고령의 옛 담임에게 DJ는 "접니다. 도요타입니다"라고 일본어로 인사했다. 무쿠모토는 "(DJ는) 항상 1등이었고, 품행이 방정했고, 웅변을 잘해 정계의 큰 인물이 되리라 생각했다"고 감개무량해 했다. '도요타 다이쥬'란 일본어 이름까지 공개하며 스승에게 예를 갖춘 속 깊은 면모에 현지 여론이 크게 움직였다고 이 전 원장은 설명했다.
DJ 취임 전까지 양국 관계는 마비 상태였다. 일본 정치인의 잇따른 망언에 김영삼 (YS) 전 대통령이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대응하면서다. 그래서 3박 4일간 DJ의 파격 행보가 더 주목을 받았다. DJ는 만찬을 주재한 아키히토(明仁) 일왕을 두 번이나 "천황폐하"로 불렀다. 이런 DJ에 일왕은 "한때 한반도의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다. 그것에 대한 깊은 슬픔은 항상 본인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천황폐하 호칭이 논란이 되자 DJ는 기자들에게 "그 나라 지도자의 호칭은 그 나라 국민들이 불러주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 좋다. 일본 사람은 천황이라 부르니 천황이라 불러주고, 영국은 여왕이라 부르니 여왕이라 불러주는 것이다. 우리가 고쳐 부르며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자서전에도 "외교가 상대를 살피는 것이라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호칭하는 게 마땅하다"고 썼다.
납치 사건, 책임 추궁은 없었다
DJ를 맞는 일본 정부가 가장 걱정한 건 1973년 납치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이었다. 자국 영토에서 벌어진 사건에도 일본은 수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었다. 방일한 DJ가 이 문제를 꺼낼까 일본이 우려한다는 보고서를 이종찬 국정원장이 건네자 DJ는 "놓고 가세요"라고만 했다. 그런데 DJ는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에게 관련 내용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에서 납치 관련 질문을 받고선 "진상규명을 위한 적절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장래에 필요한 의견을 발표할 예정"이란 원론적 답변만 했다. 과거 자신이 당한 비극이 양국 관계의 걸림돌이 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980년 사형 선고를 받았던 내란 음모 재판 최후진술에서 DJ는 "훗날 민주주의가 회복되겠지만 결코 정치 보복은 안된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런 용서의 정신이 대일 외교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DJ의 이런 태도에 일본이 크게 놀랐음은 물론이다.
'사쿠라' 비판에도 "국교정상화 불가피"
DJ-오부치 선언 중 가장 논쟁적 화두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었다. 국내에선 "개방은 시기상조, 한국이 문화 식민지가 된다"는 반발이 거셌다. 그럼에도 결단을 내린 이유에 대해 DJ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국민과 문화의 저력을 믿었다. 중국 문화권에 있으면서도 왜 동화되지 않았는가.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문화로 재창조한 독창성 때문이다. 문화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의 우열로만 판단해 교류할 수는 없다. 일본 문화를 막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훗날 K-문화 융성의 토대를 만든 이 결단의 토대는 뭘까. 목포 김대중 기념관 어록 코너에도 적혀 있듯 DJ는 평소에도 "지도자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 "국민보다 딱 반걸음 앞서가야 한다"며 실용적, 현실적 리더십 화두를 자주 던졌다. 정치 입문 전 목포에서 해운회사·언론사 사장을 지낸 경력도 이런 가치관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심지어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 논란 때도 여타 야당 정치인들과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 그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미루면 세계의 흐름을 놓치고 우리만 고립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협상에 불이익이나 굴욕이 있어선 안 되지만 국교 정상화 자체는 불가피하다는 '조건부 찬성'이었다. 여당 첩자를 뜻하는 '사쿠라' 비판까지 들었지만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며 소신을 지켰다.
"최상의 결과 위해 정교하게 노력"
DJ의 대일 외교는 여야 모두에 돌직구처럼 아픈 교훈을 던진다. 대통령실은 야심 차게 내놓은 징용 해법과 방일 성과가 왜 기대만큼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지 성찰해야 한다. DJ-오부치 선언엔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DJ는 이런 깊은 사과를 끌어내기 위해, 어업협정 등 묵은 현안의 타결을 위해 디테일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자서전에 "DJ-오부치 선언의 성취는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나는 다만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정교하게' 노력했음을 밝힌다"라고 썼다. '정교하게'란 단어에 강조의 의미를 담은 홑따옴표까지 달았다. 실제로 DJ의 일본 도착 직전까지 '사죄'의 일본어 표현을 둘러싼 숨 가쁜 협상이 진행됐다.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징용 해법이 미래를 위한 결단인 건 맞다. 그러나 피해자 설득, 국민 여론에 대한 공손함, 일본의 호응 조치 등 디테일에 부족함이 없었는지 '결단'에 치중해 정교함과 치열함을 간과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횟집 이름까지 반일 소재로
DJ를 정치적으로 계승한다지만 대일 외교에서 민주당은 DJ와 정반대다. 문재인 정부 때 ‘토착왜구’와 ‘죽창가’로 상징되는 대일 강경론으로 "국내 정치용 반일 몰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던 이들이 또다시 반일 모드 고조에 총력전을 펴고 있다. 최근 소속 의원 4인의 무작정 후쿠시마행은 '막무가내 빈손 외교' 비판을 자초했다. 강성 지지자들은 윤 대통령이 방문한 횟집의 이름까지 반일의 소재로 삼고 있다. 세계적인 조류에 민감했고, 국익에 철저했던 실용 외교주의자 DJ는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어떻게 바라볼까.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은커녕 공당으로서의 기본 소양과 상식, 책임감까지 완전히 상실한 모습에 말문이 탁 막혔을 것 같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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