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게 가스라이팅 맞았네’…억압된 관계 일깨우고 싶었죠
“영실아, 목욕하러 안 올래? 너희 집에 욕조 없잖아.” 헤어진 여자친구 영실(옥자연)이 거절 못 하는 성격이란 걸 아는 인식(기윤)은, 이런 전화로 집에 불러들인다. 자신의 욕구 해소를 위해서다. 상대 심리·상황을 조작해 정신을 옭아매는 ‘가스라이팅’이 떠오른다. 영화 ‘사랑의 고고학’ 중 한 대목이다.
12일 개봉한 영화는 고고학자 영실이 발굴지에서 우연히 인식을 만나 사랑에 빠진 이후 10년 얘기다. 상영시간이 163분인데도 몰입도가 높다. 인식이 영실의 죄책감을 자극해 이용하는 과정을 실제처럼 생생하게 그렸다. 일상에서 가스라이팅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미묘한 지점까지 짚어냈다.
영화는 전주영화제 한국경쟁 심사위원특별언급상·배우상(옥자연),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독불장군상·독립스타상(기윤) 등을 받으며 배우 연기와 주제의식을 두루 칭찬받았다. 싱가포르국제영화제는 이 영화를 아시아 경쟁부문에 초청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 후유증이 남긴 복잡한 감정을 좇는 여성의 이야기 속에서 절제된 연기가 돋보인다”고 호평했다. 각본을 겸한 이완민(41) 감독을 10일 서울 사당동 아트나인 영화관에서 만났다.
Q : 관계의 고민에서 영화가 시작됐다고.
A : “우리는 관계에 있어 환상을 만들고 상대를 어떤 이상형에 맞추려고 하진 않나. 전작 ‘누에치던 방’(2018)을 마칠 때쯤 ‘미투’ 운동이 있었고, 나 자신의 관계도 재해석해보게 됐다.”
Q : 영화 속 영실과 감독이 닮은 듯하다.
A : “내면을 다루는 영화다 보니 내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 자료나 로베르 브레송의 ‘부드러운 여인’, 루이스 브뉘엘의 ‘이상한 정열’, 샹탈 애커만의 ‘갇힌 여인’ 같은 영화, 여성 화자의 에세이·소설도 많이 참고했다.”
Q : 10년 연애사를 2시간43분에 담았는데.
A : “독일 철학자 칸트가 과거에 청혼했던 사람을 10년 뒤에 찾아가 ‘그래서 생각해봤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영실도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다. 독립영화다 보니 상영시간에 대한 상업적 압박이 없었고, 함께한 배급사·제작사도 동의해줘서 배낭여행 하듯 정서적으로 요동치는 곳에 더 오래 머물며 영화를 만들었다. 유년기부터 억압 상태에 놓인 경우 가스라이팅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다는 부분을 살리고 싶었다. 300분짜리 편집본도 있었지만 자의식 과잉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쳐냈다.”
인식 역의 기윤은 ‘한강에게’ ‘정말 먼 곳’ 등 독립영화에서의 섬세하고 솔직한 모습이 이 감독 눈에 들었다고 한다. 이 감독은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가까운 관계이다 보니 어디까지가 선을 넘는 것인지 인식하기 어렵다”며 “전형적인 빌런(악당)보다 악의 평범성,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어떤 경계들을 건드려 쉽게 벗어나거나 해석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이 감독은 “가스라이팅 상황 자체를 더 수면 위로 끌어내 얘기해보고 싶었다”며 “극 중 영실은 인식에게 사과를 받긴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 영실이 느낀 당혹감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력”이라고 덧붙였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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