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이 나올 것 같은 풀밭, 동면에서 깨어나면
[이완우 기자]
내리는 빗방울마다 곡식이 되도록 풍년을 기원하는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를 바라보는 4월 중순이다. 지리산 정령치 습지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찾아갔다. 정령치(해발 1,172m)는 지리산 주능선인 노고단으로 진행하는 백두대간을 횡단하는 고갯마루이다.
▲ 정령치 |
ⓒ 이완우 |
구룡계곡에는 봄이 무르익어 벚꽃이 지면서 진달래가 한창인데, 정령치는 봄이 고갯길을 천천히 걸어서 올라오는지 아직 겨울의 끝자락 같다. 정령치에서 고리봉(해발 1,305m)의 90% 높이 산비탈에 있는 정령치 습지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찾아가는 구간은 전국 국립공원이 선정한 걷기 좋은 숲길이다.
정령치는 백두대간의 고리봉과 만복대 사이에 말안장같이 낮은 지형이다. 정령치에서 고리봉까지는 800m의 거리이고, 이 산 기슭의 습지까지는 500m의 거리이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습지에서 100m 위에 있다.
고리봉 방향의 백두대간 마루금을 300m 진행하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200m 숲길로 들어가면 정령치 습지이다. 겨울 삭풍처럼 세찬 바람이 소리가 거칠게 너덜지대의 바위 위를 흐르는데, 습지는 잣나무 숲속에서 고요하다.
정령치 습지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 정령치 습지. <겨울왕국2>에 등장하는 요정 트롤을 닮았다. |
ⓒ 이완우 |
습지를 바라보니 어린 시절 동화 같은 고향의 풍경이 되살아난다. 모를 심은 논 옆에는 으레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 작은 둠벙의 수초에서 풀잠자리의 날갯짓이 시작되었고, 붕어들이 웅덩이에 담긴 하늘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 작은 웅덩이와 그 많던 습지의 기억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배치도 |
ⓒ 이완우 |
가로 20m 높이 10m의 마애불상군 암벽 앞에 돌담을 겹으로 쌓아 보호하고 있다. 암벽 우측에 높이 4m의 본존불로 보이는 불상은 얼굴 상호는 돋을새김을 하고 옷 주름은 음각하였다.
중앙의 불상은 코는 돋을새김하고 얼굴 둘레와 눈썹, 눈과 입은 음각하였다. 풍화로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불상들도 대체로 음각이었을 것이다. 음각으로 처리한 도상들이 천 년 동안 10cm가 풍화 마멸된다면 온전하기는 어렵다.
▲ 개령암지 마애불 |
ⓒ 이완우 |
습지와 마애불상군을 탐사하고 갈림길로 되돌아 와서 백두대간 마루금을 500m 진행하면 고리봉 정상이다. 고리봉으로 오르는 길은 아직 꽃눈이 침묵하는 진달래 관목의 터널이며, 너덜지대의 바위 계단이 많다. 너덜바위 사이로 토양은 풍부하고, 푸석 바위가 침식되고 돌알만 남은 탑바위들이 의젓하다.
▲ 고리봉 정상 조망 |
ⓒ 이완우 |
해발고도 500m 내외의 운봉고원은 풍화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남원화강암 지대로서 풍화 침식되어 낮아졌다. 지리산은 변성 편마암으로 풍화에 강하여 백두대간으로 우뚝 서고 풍부한 흙을 남겨 생명의 터전이 되었다. 고리봉 정상에서 백두대간이 운봉고원에서 생동감 있게 요동치는 지형 변화를 살펴본다.
▲ 백두대간 산맥 마루금 지방도로 |
ⓒ 이완우 |
운봉고원에서 몇 만 년 전에는 구룡계곡 양쪽의 산줄기가 이어지고 지리산둘레길 1코스의 구룡치 고개로 연결되어 백두대간의 원래 마루금이었을 것이다. 지리산으로 진입하는 백두대간은 거대한 파충류처럼 꿈틀거리고 살아 움직이며 3km 정도를 동쪽으로 이동하여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지리산은 18억 년 전 지구의 하부지각에서 형성된 선캄브리아기 암석들이 지표에 노출되어 풍화 침식된 지형으로 지각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한다. 지리산 고리봉은 흙, 바위, 바람과 흐린 구름이 어울려 풍화를 재촉하고 있다.
고리봉을 내려오며 생각해 본다. 석기 시대, 철기 시대와 규소(반도체)를 활용한 정보화 시대로 이어진 인류 역사가 결국 암석을 활용한 문명 발전 과정이 아닌가? 너덜 길옆에 하얀 차돌(석영) 암맥이 터를 잡았고, 돌 틈에는 흰 제비꽃이 피었다.
지리산 야생화와 모데미꽃
▲ 야생화 지리산계곡 누른괭이눈 |
ⓒ 이완우 |
구룡계곡 탐방로에서 야생화를 탐사하는 사진작가를 우연히 만났는데 모데미꽃을 찾는 중이란다. 25년 경력의 야생화 향토 사진작가 김태윤(58세, 전북 남원시)씨다. 미나리아재비과의 모데미꽃은 지리산 운봉고원 모데미골(회덕마을)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가 1935년에 발견한다. 한국 고유 특산종 희귀식물로 아름다운 모데미꽃의 가치를 낮추려고 이 일본인 학자가 일부러 모데미풀로 이름 지어서 등록했을 것이라고 김태윤씨는 힘주어 말했다.
▲ 야생화 지리산계곡 모데미꽃. (김태윤 2020.4.16. 오전 10:37) |
ⓒ 이완우 |
예전의 회덕마을은 구룡폭포의 상류로서 생태계가 원형을 유지하여 구릉지는 억새가 많고 습지에는 모데미꽃이 군락을 이루었을 것이다. 구릉지와 하천 강변을 농경지로 개간하고 하천에 둑을 높이고 직선화한 환경 변화는 습지를 없앴다. 모데미꽃이 발견된 모데미 마을에서 현재는 모데미 꽃을 찾을 수가 없다. 이 꽃의 꽃말은 슬픈 추억과 아쉬움이다.
김태윤씨는 2020년 4월에 지리산 구룡계곡의 개울가에서 이끼 낀 축축한 바위 위에 자리 잡은 모데미꽃을 만났다. 그런데 큰비로 계곡에 물이 넘쳐 바위 위의 모데미꽃 개체가 사라지고 말았으며, 이후로 지리산 계곡에서 모데미꽃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성과가 없다고 한다.
모데미꽃은 태백산과 소백산 등 여러 곳의 깊은 산속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 자라고 있다. 지리산 어느 계곡에서 모데미꽃이 푸른 생명력을 유지하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길 바란다.
정보화 시대와 지리산의 지혜
▲ 개령암지 마애불 |
ⓒ 이완우 |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끼리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경쟁은 의미가 약해졌다. 지식과 정보를 편집하는 기교가 출중한 대화형 인공지능(ChatGPT)이 출현했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의 지혜와 창조성, 감정과 정서, 생명 존중과 공존의 의지는 더 가치 있음을 깨닫게 된다.
▲ 개령암지 마애불 비로자나불 |
ⓒ 이완우 |
지식과 정보는 속성이 분열과 경쟁이지만, 지혜는 포용과 상생이다. 암석을 활용하여 석기와 철기 시대를 이어 실리콘의 정보화 시대를 열었는데, 이제는 암석과 풍화된 흙에서 지혜를 배워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지리산에서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깨닫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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