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이 나올 것 같은 풀밭, 동면에서 깨어나면

이완우 2023. 4. 16.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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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정령치 습지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탐사

[이완우 기자]

내리는 빗방울마다 곡식이 되도록 풍년을 기원하는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를 바라보는 4월 중순이다. 지리산 정령치 습지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찾아갔다. 정령치(해발 1,172m)는 지리산 주능선인 노고단으로 진행하는 백두대간을 횡단하는 고갯마루이다.

지리산국립공원 들머리인 전북 남원시 구룡계곡의 육모정에서 산간도로 12.6km 거리를 25분쯤 승용차로 굽이굽이 오르다 보면 정령치에 도착한다. 정령치 고갯마루를 넘어서 내려가면 뱀사골계곡과 성삼재 방향을 선택하는 달궁삼거리가 나온다. 이른 아침,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이 열어놓은 지리산 주능선 마루금을 정령치 전망대에서 조망한다.
 
 정령치
ⓒ 이완우
 
구룡계곡에는 봄이 무르익어 벚꽃이 지면서 진달래가 한창인데, 정령치는 봄이 고갯길을 천천히 걸어서 올라오는지 아직 겨울의 끝자락 같다. 정령치에서 고리봉(해발 1,305m)의 90% 높이 산비탈에 있는 정령치 습지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찾아가는 구간은 전국 국립공원이 선정한 걷기 좋은 숲길이다.

정령치는 백두대간의 고리봉과 만복대 사이에 말안장같이 낮은 지형이다. 정령치에서 고리봉까지는 800m의 거리이고, 이 산 기슭의 습지까지는 500m의 거리이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습지에서 100m 위에 있다.

고리봉 방향의 백두대간 마루금을 300m 진행하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200m 숲길로 들어가면 정령치 습지이다. 겨울 삭풍처럼 세찬 바람이 소리가 거칠게 너덜지대의 바위 위를 흐르는데, 습지는 잣나무 숲속에서 고요하다.

정령치 습지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정령치 습지(해발 1,180m)의 주인인 산뚝사초는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너덜바위투성이 산비탈 아래의 습지는 가로 16m 세로 25m의 직사각형 모양이다. 습지 위쪽에 가로 70cm와 세로 90cm 크기의 샘에서 용출수가 솟아 몇 발짝 실개천으로 흐른다. 여름에 꽃 피울 꽃창포, 동자꽃과 동의나물은 고산 습지의 봄은 아직 멀었음을 알고, 습지 속에 숨어 있다. 딱총나무만 잎을 틔우며 꽃봉오리를 맺고 있다.
 
 정령치 습지. <겨울왕국2>에 등장하는 요정 트롤을 닮았다.
ⓒ 이완우
 
습지를 바라보니 어린 시절 동화 같은 고향의 풍경이 되살아난다. 모를 심은 논 옆에는 으레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 작은 둠벙의 수초에서 풀잠자리의 날갯짓이 시작되었고, 붕어들이 웅덩이에 담긴 하늘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 작은 웅덩이와 그 많던 습지의 기억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습지 위쪽 암벽에 병풍처럼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12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풍화 침식이 오래되어 2개의 불상만 보인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1100년 전 후삼국 시대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암석의 풍화가 대체로 1년에 0.1mm 진행된다면, 천 년이면 10cm가 풍화로 마멸된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배치도
ⓒ 이완우
 
가로 20m 높이 10m의 마애불상군 암벽 앞에 돌담을 겹으로 쌓아 보호하고 있다. 암벽 우측에 높이 4m의 본존불로 보이는 불상은 얼굴 상호는 돋을새김을 하고 옷 주름은 음각하였다.

중앙의 불상은 코는 돋을새김하고 얼굴 둘레와 눈썹, 눈과 입은 음각하였다. 풍화로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불상들도 대체로 음각이었을 것이다. 음각으로 처리한 도상들이 천 년 동안 10cm가 풍화 마멸된다면 온전하기는 어렵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주불로 보이는 비로자나불은 진리, 지혜와 깨달음의 광명을 상징한다. 어리석은 사람도 지리산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한다. 지리산이 지혜의 산이고, 비로자나불이 진리의 광명을 빛내고 있으니 지리산의 정체성에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바위의 도상은 풍화로 마멸되지만, 진리의 광명은 영원함을 개령암지 마애불에서 확인한다.
 
 개령암지 마애불
ⓒ 이완우
 
습지와 마애불상군을 탐사하고 갈림길로 되돌아 와서 백두대간 마루금을 500m 진행하면 고리봉 정상이다. 고리봉으로 오르는 길은 아직 꽃눈이 침묵하는 진달래 관목의 터널이며, 너덜지대의 바위 계단이 많다. 너덜바위 사이로 토양은 풍부하고, 푸석 바위가 침식되고 돌알만 남은 탑바위들이 의젓하다.
지리산은 흙산이어서 주능선과 여러 산줄기가 완만하여 너그럽다. 두터운 흙은 지리산의 생태적 유전자이다. 고리봉 가는 너덜길에 앙증맞은 개별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이 거친 소리와 압력으로 달려와서 구름을 산봉우리로 훌쩍 넘긴다. 고리봉 정상에서 해발 고도에 따라 계절이 다름을 체감한다. 멀리 아래의 뱀사골 계곡에는 산벚꽃이 수채화를 이루어 따사롭게 보인다.
 
 고리봉 정상 조망
ⓒ 이완우
 
해발고도 500m 내외의 운봉고원은 풍화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남원화강암 지대로서 풍화 침식되어 낮아졌다. 지리산은 변성 편마암으로 풍화에 강하여 백두대간으로 우뚝 서고 풍부한 흙을 남겨 생명의 터전이 되었다. 고리봉 정상에서 백두대간이 운봉고원에서 생동감 있게 요동치는 지형 변화를 살펴본다.
운봉고원에서 몇 만 년에 걸친 구룡계곡 주천천의 하천쟁탈이 있었다. 그 결과로 백두대간이 수정봉에서 노치마을, 60번 지방도로와 고기삼거리를 지나서 고기저수지를 오른쪽에 두고 고리봉으로 올라오는 능선이 현재의 백두대간 마루금이 되었다. 고기삼거리에서 노치마을까지 2km가 넘는 2차선 도로와 농로가 백두대간 산맥으로 어엿하여 인상적인 지역이다.
 
 백두대간 산맥 마루금 지방도로
ⓒ 이완우
 
운봉고원에서 몇 만 년 전에는 구룡계곡 양쪽의 산줄기가 이어지고 지리산둘레길 1코스의 구룡치 고개로 연결되어 백두대간의 원래 마루금이었을 것이다. 지리산으로 진입하는 백두대간은 거대한 파충류처럼 꿈틀거리고 살아 움직이며 3km 정도를 동쪽으로 이동하여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지리산은 18억 년 전 지구의 하부지각에서 형성된 선캄브리아기 암석들이 지표에 노출되어 풍화 침식된 지형으로 지각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한다. 지리산 고리봉은 흙, 바위, 바람과 흐린 구름이 어울려 풍화를 재촉하고 있다.

고리봉을 내려오며 생각해 본다. 석기 시대, 철기 시대와 규소(반도체)를 활용한 정보화 시대로 이어진 인류 역사가 결국 암석을 활용한 문명 발전 과정이 아닌가? 너덜 길옆에 하얀 차돌(석영) 암맥이 터를 잡았고, 돌 틈에는 흰 제비꽃이 피었다.

지리산 야생화와 모데미꽃

정령치 습지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탐사를 마치고 구룡계곡 탐방로에서 야생화를 찾아보았다. 줄딸기꽃, 산자고, 개별꽃, 누른괭이눈과 딱총나무를 지리산 정령치 일대와 구룡계곡에서 만났으나 주제로 삼은 모데미꽃은 보이질 않았다.
 
 야생화 지리산계곡 누른괭이눈
ⓒ 이완우
 
구룡계곡 탐방로에서 야생화를 탐사하는 사진작가를 우연히 만났는데 모데미꽃을 찾는 중이란다. 25년 경력의 야생화 향토 사진작가 김태윤(58세, 전북 남원시)씨다. 미나리아재비과의 모데미꽃은 지리산 운봉고원 모데미골(회덕마을)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가 1935년에 발견한다. 한국 고유 특산종 희귀식물로 아름다운 모데미꽃의 가치를 낮추려고 이 일본인 학자가 일부러 모데미풀로 이름 지어서 등록했을 것이라고 김태윤씨는 힘주어 말했다.
 
 야생화 지리산계곡 모데미꽃. (김태윤 2020.4.16. 오전 10:37)
ⓒ 이완우
 
예전의 회덕마을은 구룡폭포의 상류로서 생태계가 원형을 유지하여 구릉지는 억새가 많고 습지에는 모데미꽃이 군락을 이루었을 것이다. 구릉지와 하천 강변을 농경지로 개간하고 하천에 둑을 높이고 직선화한 환경 변화는 습지를 없앴다. 모데미꽃이 발견된 모데미 마을에서 현재는 모데미 꽃을 찾을 수가 없다. 이 꽃의 꽃말은 슬픈 추억과 아쉬움이다.

김태윤씨는 2020년 4월에 지리산 구룡계곡의 개울가에서 이끼 낀 축축한 바위 위에 자리 잡은 모데미꽃을 만났다. 그런데 큰비로 계곡에 물이 넘쳐 바위 위의 모데미꽃 개체가 사라지고 말았으며, 이후로 지리산 계곡에서 모데미꽃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성과가 없다고 한다.

모데미꽃은 태백산과 소백산 등 여러 곳의 깊은 산속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 자라고 있다. 지리산 어느 계곡에서 모데미꽃이 푸른 생명력을 유지하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길 바란다.

정보화 시대와 지리산의 지혜

암석형 행성인 지구는 어쩌면 하나의 커다란 돌멩이이다. 원시 시대 인간은 부싯돌로 불을 얻었고, 돌 조각을 도구로 석기시대를 개척했다. 암석에서 철 성분을 추출해 철기 시대를 꽃피웠다. 현재는 규소(석영)를 가공해 실리콘을 제조하고 정보화 시대를 열었다.
 
 개령암지 마애불
ⓒ 이완우
 
정보화 시대에 사람들끼리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경쟁은 의미가 약해졌다. 지식과 정보를 편집하는 기교가 출중한 대화형 인공지능(ChatGPT)이 출현했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의 지혜와 창조성, 감정과 정서, 생명 존중과 공존의 의지는 더 가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리산 능선에 야생화가 핀 부드러운 흙길의 토양은 지리산을 찾은 우리의 마음을 너그럽게 한다. 흙은 경쟁하지 않고 상생하는 생명을 포용한다. 흙이 물과 만나는 습지는 흙과 물이 지향하는 생명의 고향이다. 바위, 흙과 물이 풍부한 지리산은 어머니의 사랑을 실천하며 수많은 생명체를 포용한다.
 
 개령암지 마애불 비로자나불
ⓒ 이완우
 
지식과 정보는 속성이 분열과 경쟁이지만, 지혜는 포용과 상생이다. 암석을 활용하여 석기와 철기 시대를 이어 실리콘의 정보화 시대를 열었는데, 이제는 암석과 풍화된 흙에서 지혜를 배워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지리산에서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깨닫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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