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읽고 찾은 덕수궁, 뿌듯하기도 비감해지기도
[이지애 기자]
봄엔 저절로 바빠진다. 개나리부터 목련, 벚꽃은 물론 때 이른 라일락까지 화사한 봄기운을 놓칠세라 발걸음이 자꾸만 밖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기가 아쉬워 도심 한복판의 덕수궁으로 향했다. 덕수궁은 집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여러모로 친숙하다. 서울시의 '문화가 있는 날' 공연을 즐기기도 했고, 가족들과 나들이차 한가로운 시간을 종종 보내기 때문이다.
주말에 들린 덕수궁은 대한문 월대공사가 진행 중이라 가림막 때문에 입구가 답답했지만, 전각들 사이로 만개한 개나리와 진달래 앞에서 사진 찍는 청춘들이 벌써 즐비했다. 낭만적 봄날의 정취도 정취지만, 사실 덕수궁을 찾은 이유는 요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읽기만 하면 재미가 훨씬 덜할 텐데, 읽고 나서 답사를 가니 서울의 궁궐들은 물론 도성 안팎의 재미있는 유래와 역사 이야기가 그렇게 새롭고 재미있을 수가 없다. 하여 두어 달 전부터 창덕궁, 창경궁, 석파정 등을 틈나는 대로 둘러보던 차이다.
▲ 덕수궁 경내 각 전각의 위치. |
ⓒ 덕수궁 홈페이지 |
덕수궁에서 잘 알려진 건물은 석조전이지만, 덕수궁의 뿌리는 석어당과 즉조당이라고 한다. 석어당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임시로 머물던 월산대군의 고택으로 늠름한 2층 한옥이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인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고 삼촌이 왕이 되는 바람에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궁을 나와 살게 되었다.
▲ 선조가 임시행궁으로 사용했던 월산대군의 고택 석어당. |
ⓒ 덕수궁 홈페이지 |
세월이 흐른 후 경운궁이 다시 활력을 찾은 시기는 고종 때이다. 아관파천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근대식 궁궐체계를 갖추고자 노력했다. 고종이 커피를 즐기던 서양식 정자 정관헌과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복도로 연결된 준명당과 즉조당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궁궐 곳곳에 대한제국의 안타까운 역사가 스며있어 가슴 저렸다.
▲ 대한제국의 상징인 석조전. |
ⓒ 덕수궁 홈페이지 |
덕수궁 담장 밖에는 영국 대사관을 비롯한 구세군 성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옛 독일공사관(현 서울시립미술관) 등 유서 깊은 곳이 많지만, 2018년부터 공개된 '고종의 길'과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고종의 마지막 집무실이었다는 중명전이 특별히 인상 깊다.
'고종의 길'은 옛 선원전 터와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좁은 길로 덕수궁 북쪽 돌담길 끝에서 구 러시아 공사관에 이르는 길이다. 을미사변(1895년)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궁녀의 교자를 타고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가던 그 서러움의 길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걷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잊힌 역사인가 싶어 걸으며 괜히 울적했다.
▲ 고종황제의 마지막 집무실이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중명전. |
ⓒ 이지애 |
"덕수궁을 답사하자면 이처럼 건물 곳곳에서 가슴 저리게 하는 역사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궁궐 공원으로서 덕수궁을 편안히 즐기자면 때로는 오붓하고 정겨운 서정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답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우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덕수궁이라는 궁궐의 중요한 성격이기도 하다." (227쪽)
예쁜 봄꽃을 맞으러 구석구석 다니기 좋은 때다. 이왕 즐기는 김에 역사도 좀 챙겨보고 싶다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강력 추천한다. 서울은 물론 전국 유명 지역들이 망라되어 있으니 당분간 즐겁게 답사 다닐 곳이 많을 것 같다. 이 봄에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덕분에 알게 된 소박한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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