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읽고 찾은 덕수궁, 뿌듯하기도 비감해지기도

이지애 2023. 4. 1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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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정취에 더해 역사 이야기 챙겨보는 재미도 새록새록

[이지애 기자]

봄엔 저절로 바빠진다. 개나리부터 목련, 벚꽃은 물론 때 이른 라일락까지 화사한 봄기운을 놓칠세라 발걸음이 자꾸만 밖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기가 아쉬워 도심 한복판의 덕수궁으로 향했다. 덕수궁은 집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여러모로 친숙하다. 서울시의 '문화가 있는 날' 공연을 즐기기도 했고, 가족들과 나들이차 한가로운 시간을 종종 보내기 때문이다.

주말에 들린 덕수궁은 대한문 월대공사가 진행 중이라 가림막 때문에 입구가 답답했지만, 전각들 사이로 만개한 개나리와 진달래 앞에서 사진 찍는 청춘들이 벌써 즐비했다. 낭만적 봄날의 정취도 정취지만, 사실 덕수궁을 찾은 이유는 요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읽기만 하면 재미가 훨씬 덜할 텐데, 읽고 나서 답사를 가니 서울의 궁궐들은 물론 도성 안팎의 재미있는 유래와 역사 이야기가 그렇게 새롭고 재미있을 수가 없다. 하여 두어 달 전부터 창덕궁, 창경궁, 석파정 등을 틈나는 대로 둘러보던 차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미술사학자 유홍준이 1993년 '남도답사일번지'를 1권으로 시작하여 북한지역과 제주를 포함한 국내편 12권, 일본편 5권, 중국편 3권으로 저술한 기행문 시리즈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체감하게 만들며 전 국민을 답사열풍에 휩싸이게 만든 인기 시리즈로도 유명하다. 이 중 9권부터 12권까지가 서울편이고, 덕수궁 관련 내용은 10권에서 다뤄지고 있다.
 
 덕수궁 경내 각 전각의 위치.
ⓒ 덕수궁 홈페이지
책에 나온 정보를 먼저 접하고 가니 덕수궁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거스른 안경을 쓴 것처럼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대가 되살아난 듯 현재 모습 위로 생생히 겹쳐 보였달까? 건물과 터가 품은 수난의 역사와 변화의 이야기들이 한결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덕수궁에서 잘 알려진 건물은 석조전이지만, 덕수궁의 뿌리는 석어당과 즉조당이라고 한다. 석어당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임시로 머물던 월산대군의 고택으로 늠름한 2층 한옥이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인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고 삼촌이 왕이 되는 바람에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궁을 나와 살게 되었다.

당시 덕수궁 터에는 왕가와 권세가의 집들이 모여있었는데, 세조가 그 터에 월산대군이 기거하도록 하사한 집이 바로 석어당이다.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내내 기거하다 선조가 이곳을 임시 행궁으로 삼은 이래로 석어당이라 불렸다고 한다. 출발은 단청도 칠해지지 않은 왕가의 사가였으나, 석어당은 어쨌든 궁이 될 운명이었나 보다.
 
 선조가 임시행궁으로 사용했던 월산대군의 고택 석어당.
ⓒ 덕수궁 홈페이지
선조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석어당 서편에 편전으로 쓰기 위한 즉조당 한 채만 지었을 뿐이라고 한다. 이후 광해군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이름 지으며 대대적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왕에 오른 인조는 즉위식을 즉조당에서 거행했을 뿐 모든 공사는 중지시켰다. 지금은 평화롭게만 보이는 즉조당이 왕좌를 둘러싸고 목숨을 건 암투가 결말지어진 장소였다는 사실에 새삼 선뜩해졌다.

세월이 흐른 후 경운궁이 다시 활력을 찾은 시기는 고종 때이다. 아관파천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근대식 궁궐체계를 갖추고자 노력했다. 고종이 커피를 즐기던 서양식 정자 정관헌과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복도로 연결된 준명당과 즉조당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궁궐 곳곳에 대한제국의 안타까운 역사가 스며있어 가슴 저렸다.

그 중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석조전이 대표적이다. 고종이 야심 차게 계획하였으나 1907년 강제 퇴위 당하며 석조전은 애초의 목적대로는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순종 승하 후엔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계획에 따라 일본인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이용되었다 한다. 고종이 이루고자 한 대한제국의 독자적 근대화가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듯, 석조전 또한 짧은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 한 것이 애처롭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석조전.
ⓒ 덕수궁 홈페이지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순종황제가 즉위 후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물러난 고종에게 '덕수'라는 칭호를 올리면서부터라고 한다. 한편, 유홍준은 덕수궁을 제대로 알려면 덕수궁 담장 밖 동서남북으로도 한 바퀴 돌 것을 권한다.

덕수궁 담장 밖에는 영국 대사관을 비롯한 구세군 성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옛 독일공사관(현 서울시립미술관) 등 유서 깊은 곳이 많지만, 2018년부터 공개된 '고종의 길'과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고종의 마지막 집무실이었다는 중명전이 특별히 인상 깊다.

'고종의 길'은 옛 선원전 터와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좁은 길로 덕수궁 북쪽 돌담길 끝에서 구 러시아 공사관에 이르는 길이다. 을미사변(1895년)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궁녀의 교자를 타고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가던 그 서러움의 길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걷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잊힌 역사인가 싶어 걸으며 괜히 울적했다.

2층 벽돌건물인 중명전은 원래 황실의 도서관이었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 후 고종황제의 마지막 편전으로 사용되었는데, 1년 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현재는 1층이 역사교육관으로 꾸며져 내부를 관람할 수 있고, 헤이그 특사 파견 등 역사적 아픔의 현장을 잘 재현하고 있으니 잊지 말고 꼭 들러볼 장소이다.
 
 고종황제의 마지막 집무실이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중명전.
ⓒ 이지애
말없는 덕수궁의 묵은 이야기들을 알고 둘러보니, 잘 몰랐던 내력을 알게 된 것이 뿌듯하기도 하고 가슴 아픈 사연에 비감해지기도 한다. 유홍준도 덕수궁에 대한 비슷한 감상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덕수궁을 답사하자면 이처럼 건물 곳곳에서 가슴 저리게 하는 역사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궁궐 공원으로서 덕수궁을 편안히 즐기자면 때로는 오붓하고 정겨운 서정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답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우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덕수궁이라는 궁궐의 중요한 성격이기도 하다." (227쪽)

예쁜 봄꽃을 맞으러 구석구석 다니기 좋은 때다. 이왕 즐기는 김에 역사도 좀 챙겨보고 싶다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강력 추천한다. 서울은 물론 전국 유명 지역들이 망라되어 있으니 당분간 즐겁게 답사 다닐 곳이 많을 것 같다. 이 봄에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덕분에 알게 된 소박한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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