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올래?" 욕구 숨긴 전남친…"가스라이팅 체험" 소문난 영화
"피해자나 가해자나 가스라이팅 인식 어려워
이 영화가 참고 자료 되길 바랐죠"
“영실아, 목욕하러 안 올래? 너희 집에 욕조 없잖아.”
헤어진 여자친구 영실(옥자연)이 거절 못 하는 성격이란 걸 아는 인식(기윤)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전화로 영실을 집에 불러들인다. 실제 목적은 자신의 욕구 해소다. 그는 이미 영실이 쓴 시를 마치 자신이 쓴 가사인 것처럼 곡을 붙여 밴드 활동까지 하고 있다. 상대방의 심리‧상황을 조작해 정신을 옭아매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대번에 떠오르는 행동이다.
“가스라이팅 체험 영화” “‘킹받는다’ 잘 포착”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에서 “가스라이팅 체험 영화”로 입소문 난 화제작 ‘사랑의 고고학’(감독 이완민)의 한 대목이다. 12일 개봉한 영화는 고고학자인 영실이 발굴지에서 우연히 인식을 만나 사랑에 빠진 이후 10년 세월을 무려 163분의 상영시간에 담아냈다. 그런데도 영화는 몰입도가 높다.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자신은 유약하고 상처를 잘 받는다고 강조한 인식이 영실의 죄책감을 자극하며 이용하는 과정을 실제처럼 생생하게 그려서다. 가스라이팅을 이용한 각종 범죄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요즘, 일상에서 가스라이팅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미묘한 지점까지 짚어냈다. 한편으로는 뭐든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영실이 스스로 지나온 ‘관계의 유물’을 발굴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각본을 겸한 이완민(41) 감독은 “어떤 관계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소개했다. 10일 서울 사당동아트나인 영화관에서 만난 그는 “가스라이팅 상황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인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사람들에게 영화가 참고자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Q : 관계에 대한 환상 없이 사는 것에 대한 고민에서 영화가 시작됐다고.
“우리는 관계에 있어 환상을 만들고 상대방을 어떤 이상향에 맞추려고 하고 있진 않나. 전작 ‘누에치던 방’(2018)을 마칠 때쯤 ‘미투’ 운동이 있었고 나 자신의 관계도 재해석해보게 됐다. 문제적 상황에 놓여있다는 걸 인식했다.”
Q : 영실을 고고학자로 설정했다.
“연애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 사회에서 맺는 관계들을 두루 살펴보는 과정이 고고학적 작업과 닮았다고 느꼈다.”
Q : 지금 기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까지, 영화 속 영실과 당신은 닮은 듯하다.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영화다 보니 내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 자료나 로베르 브레송의 ‘부드러운 여인’, 루이스 브뉘엘의 ‘이상한 열정’, 샹탈 애커만의 ‘갇힌 여인’ 같은 영화, 여성 화자의 에세이‧소설도 많이 참고해 반영했다.”
이완민 “가스라이팅 가해자 가까워 인식 어렵죠”
Q : 영실의 10년 연애사를 2시간 43분에 담았는데.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가 과거에 청혼했던 사람을 10년 뒤에 다시 찾아가 ‘그래서 생각해봤느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영실도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다. 영화 속 영실이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게 지겹다고 한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려고 만든 영화는 아니다. 독립영화다 보니 상영시간에 대한 상업적 압박이 없었고 함께한 배급사‧제작사도 동의해줘서 배낭 여행하듯 정서적으로 요동치는 곳에 더 오래 머물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120분짜리 편집본은, 영실의 부모님 장면을 살리기 위해 포기했다. 유년기부터 억압 상태에 놓인 경우 가스라이팅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다는 부분을 살리고 싶었다. 300분짜리 편집본도 있었지만 자의식 과잉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쳐내다 보니 지금의 영화가 됐다.”
영실 역을 맡은 옥자연의 차분한 연기 변신도 칭찬받는다. 인식 역의 기윤은 ‘한강에게’ ‘정말 먼 곳’ 등 독립영화에서 섬세하고 솔직한 모습이 이 감독 눈에 들었다고 한다. 이 감독은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가까운 관계이다 보니 어디까지가 선을 넘는 것인지 인식하기 어렵다”면서 “전형적인 빌런(악당)보다 악의 평범성,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어떤 경계들을 건드려서 쉽게 벗어나거나 해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했다.
영실 역시 피해자로 남기보단 또 다른 남성 우도와의 관계에 환상을 품거나 오류에 빠진다. 이 감독은 “단순히 피해자, 가해자 구도로 그리면 관객들이 개인 사이의 일로 넘겨버리기 쉽기 때문에 가스라이팅 상황 자체를 더 수면 위로 끌어내 얘기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극 중 영실은 인식에게 사과를 받긴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 영실이 느낀 당혹감이 제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력이기도 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결국 폭력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게 먼저죠. 나도 그렇게 인식하면서 억압적인 관계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그런 억압 하에 놓인 사람이나, 그런 억압을 행사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참고자료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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