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뭉개고 미국 국빈 방문, 장기적으로 '오점' 될 것"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
[이영광 기자]
미국 정보기관인 CIA(중앙정보국)가 우리나라 대통령실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도청한 의혹이 알려지며 들썩였다. 이 같은 의혹이 드러난 건 미국 정부의 기밀 문건이 온라인상에 유출되면서다. 도청 사실이 알려지자 대통령실은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곧이어 문건이 위조됐다거나 도청당하지 않았다는 식의 입장을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대통령실 도청 의혹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고자 지난 14일 왕선택 한평정책연구소 글로벌외교센터장과 전화 연결했다. 다음은 왕 센터장과 나눈 일문일답 정리한 것이다.
▲ 전국민중행동 관계자들이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중앙정보국이 한국 정부에 불법 도청하고 있는 행위를 재연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 유성호 |
"매우 불쾌하고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상황입니다. 또 한국 정부의 대응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면 미국 외교 역사상 보기 드문 기밀 유출 사건입니다. 앞으로 유출된 기밀의 규모라든가 유효성, 책임자, 경위 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정부에서도 일부 문건이 조작됐다는 판단이 나오고 있지만, 사태 자체가 심각하다는 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이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태도를 명확하게 하고 있어요. 굉장히 경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 왜 그럴까요?
"곧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이 있죠. 한미 동맹 차원에서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됐습니다. 때문에 국빈 방문의 장애물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고, 동맹국인 미국이 매우 곤란한 처지에 처해 있으니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 드러난 의혹만 보면, 우리가 피해자이고 미국이 가해자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피해자고 미국이 가해자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의 불법 행위가 있었는지 진상을 파악하는 게 첫째 과제가 되는 거예요. 진상 파악 결과에 따라 우리가 피해 본 부분에 대해 미국에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대응 절차가 되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보도된 내용 상당수가 위조됐다, 위조됐기 때문에 미국에 항의하지 않겠다, 또 미국이 도청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지만, 악의적으로 도청한 정황은 없다'라는 식의 얘기를 하는 건 대체 어느 나라 공직자인지 헷갈리게 만듭니다."
- 대통령실은 도청 의혹이 나오자 처음엔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는데 곧이어 문건이 위조됐다고 말하거나, 도청이 없었다고 밝혔잖아요. 이게 금방 결과가 나올 문제인가요?
"납득이 안 가는 대목입니다. 처음에 나온 정부 입장이 맞습니다. 국가 기밀 유출 사태는 진상 파악과 종합적인 판단이 이루어진 뒤 사후 대응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런 과정에 걸리는 시간은 3개월 전후가 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문제가 없다'고 하는 태도는 황당할 뿐이지요."
- 김태효 국가안보실 1처장은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도청은 불법적으로 남의 말을 엿듣는 거예요. 도둑질해서 남의 말을 듣는 건데 무슨 악의, 선의를 따져요. 도청은 그 자체로 악의예요. 한국과 미국은, 안보 군사 문제에서는 동맹이니까 서로의 대화를 공유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책 문제, 특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같은 건 민감하잖아요. 미국은 한국을 압박해서 무기를 지원하려고 나름대로 공작을 벌이고,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지원은 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상황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도청을 하면 미국 뜻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큰 거잖아요.
한미 동맹이니까 군사 협력 차원에서 선의로 도청을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군사 문제와 관련된 많은 것들이 한국과 미국 기업이 연결된 군산복합체 또는 군수 관련 기업들의 비밀과 관련이 있어요. 이런 것들은 도청 대상이 됩니다. 한국 기업이나 미국 기업에 때로는 엄청난 이익을 줄 수도 있고 때로는 엄청난 피해를 줄 수도 있어요. 악의 없는 도청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 국민의힘에서는 '미국의 도청은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하는데요.
"전 미국이 도청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공공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별거 아니다? 그건 아닙니다. 잘못된 겁니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 기본 가치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불법 행위예요. 동맹국과 우방국 사이에서 기본적인 신뢰를 침해하는 행위예요. 도청 사실이 들켰다면, 완전히 다른 성격의 사안이 되는 거예요. 들켰을 때는 별거 아닌 게 아니고 엄청난 사안입니다. 거기에 맞게 대응해야 합니다. 도청과 관련해 합당한 해명, 사과, 재발 방지 대책에 대한 약속이 있어야 사태가 수습되는 겁니다."
▲ 왕선택 한평정책연구소 글로벌외교센터장 |
ⓒ 이영광 |
- 민주당은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전 했기 때문에 도청당했다'고 주장하는데.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대통령실 이전하는 초기 논의 과정에서 정의당 소속의 김종대 전 의원이 '용산의 국방부 건물은 도청이라든가 보안 문제, 경호 문제 등에 취약성이 있다. 계속 추가 공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 바 있어요. 그런 지적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 의심하는 건 매우 합리적이죠."
-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 같은 경우 '정부가 미국을 비판하도록 해야지 대통령실 이전을 문제 삼는 건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하는데.
"유승민 의원의 말을 잘 해석해야 해요. '미국을 비판해야 되는데 왜 대통령실 이전을 문제 삼느냐'라고 하잖아요. 그 말은 맞죠. 그런데 미국을 비판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실 비판 이전을 비판하지 말라는 건 또 다른 문제예요."
-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등 다른 나라와 관련한 문건도 나왔는데요.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다른 나라도 문제 안 삼는데 왜 우리만 문제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 하냐'는 이야기를 합니다.
"유출된 기밀의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정보기관 모사드의 최고 책임자가 사법개혁 반대 시위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정보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겠죠. 프랑스도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를 포함해서 일부 국가의 특수부대원들이 다국적 특수부대를 만들어서 우크라이나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는 거예요. 프랑스는 전면 부인합니다.
우리나라 처지는 달라요. 우리나라는 김성한 실장하고 이문희 비서관하고 나눈 내용이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그 내용과 일치하잖아요. 전면적으로 부인할 내용이 아니에요, 사실 맞는 내용이거든요."
- 도청으로 알아낸 건지, 휴민트로 알아낸 건지도 중요하지 않나요?
"저도 그 문서를 봤습니다. 문서에 보면 SI-G라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SI-G라고 하는 부분은 신호 정보를 수집한 거고, G는 감마라는 거예요. 감마라는 표시는 그 정보를 수집한 방법이기도 하면서 민감한 내용을 담은 정보라는 표시라고 합니다.
SI가 들어갔다고 하는 건, 전화를 도청했든가 컴퓨터에서 이메일을 도둑질했든가 아니면 음성 음파를 탐지해서 알아냈든가, 이런 것 중 하나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도청했을 가능성이 거의 99%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동시에 또 다른 면이 있긴 합니다. 그 문서를 읽어보면 직접 인용이 하나도 없어요. 다 간접 인용이에요. 그 문서의 머리 부분에 기호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OC이에요. OC도 제목 부분에 적혀 있어요. 이 글자가 의미하는 바는 오리지널 보고서지만, 컨트롤됐다는 뜻이에요."
- 컨트롤요?
"그 기밀을 작성한 정보 담당자가 그 문건을 작성할 때 자기가 문장을 뜯어고쳤다는 뜻이에요. 오리지널이긴 하지만 문서 작성자가 어떤 이유에 의해서 문장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요약했거나 취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문장을 고쳤다는 뜻이에요. 도청해서 일단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움이 있어서 전체적인 맥락을 알기 쉽게 문장으로 고쳐서 작성했다고 문서 머리글에 표기하고 있는 겁니다."
- '미국만 도청했을까'라는 의문도 나옵니다.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미국만 용산 대통령실에 대한 도청을 시도했을까요. 아닙니다. 러시아도 했을 거고 중국도 했을 겁니다. 프랑스도 했을 거고 영국도 했을 겁니다. 북한은 안 했을까요. 북한도 했을 겁니다. 김성한 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의 대화를 미국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변국들이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이 주제가 아니라 다른 주제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진상조사를 정확하게 해서 어느 정도 뚫렸는지, 어느 기술에 의해서 뚫렸는지 알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의 해명을 들어야 돼요. 그래야 대응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지 않죠. 미국에 대해서 항의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 보안 당국자들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하고, 어느 정도 뚫렸는지에 챙겨보고 다시는 뚫리지 않게끔 노력해야죠. 그런데 그런 것들 안 하고 오히려 묻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태도를 보이고, 문제 삼지 않겠다는 황당한 태도를 보이니까 참담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 약 열흘 뒤 워싱턴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는데, 도청 문제가 영향을 줄까요?
"단기적이고 소규모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영향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장기적이고 포괄적으로 본다면 영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단기적이라는 건 국빈 방문을 준비하고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대통령의 참모들과 대통령 스스로가 이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건데요. 그러면 국빈 방문에 영향을 줄 리가 없죠. 그런데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런 부분에 대해 우리 국민들의 불만이 쌓인다는 거지요.
주권이 침해된 부분에 대해서 외교를 담당한 사람들이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않고 국민의 명예 실추시키는 쪽으로 가면, 국빈 방문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서 국민이 박수 치고 지지하는 게 아니라 혀를 끌끌 차겠죠. 국민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국빈 방문이 끝나는 거예요. 국민의 지지와 성원을 받지 못하는 외교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결국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단기적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번 국빈 방문이 역사적으로 오점이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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