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레코드]이원석 감독 "고상함 무너뜨리며 희열 느껴요"
60~70년대 비주류 영화 영향
기존 공식 비틀며 재미 추구
영화 '남자사용설명서'(2013)는 기막히게 웃긴 코미디로 10년째 회자되고 있다.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당시 '감독이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시대를 앞서간 영화로 기억된다. 영화는 개성 강한 이원석(49) 감독과 똑 닮았다. 충무로에서 가장 엣지 있는 연출자, 키치한 감독으로 사랑받는 그가 어른들의 동화를 표방한 '킬링 로맨스'로 돌아왔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꽤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는 "파김치를 먹어서 붕어빵을 먹고 있었다"며 사랑스럽게 웃더니 "냄새가 나면 말해달라"며 민트껌을 만지작거려 기자를 웃게 했다. 이어 "영화 인터뷰가 오랜만이라서 긴장된다"며 안절부절못했다. 발랄한 감독으로 2인자라면 서러울 그가 긴장하는 모습에서 어마어마한 부담감이 읽혔다.
이원석 감독은 '킬링로맨스' 이야기가 나오자 언제 긴장했냐는 듯 생기를 되찾았다. 웃고 또 웃느라 진이 빠진 인터뷰. 솔직 발랄한 감독의 답변을 일문일답으로 전한다. 영화를 꼭 닮은 감독의 유머와 매력이 관객에게 닿길 바란다.
14일 개봉한 '킬링로맨스'는 섬나라 재벌 조나단(이선균)과 운명적 사랑에 빠져 돌연 은퇴를 선언한 톱스타 여래(이하늬)가 팬클럽 3기 출신 사수생 범우(공명)를 만나 기상천외한 컴백 작전을 모의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남자사용설명서' '상의원'을 연출한 이원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뷰티 인사이드'(2015) 박정예 작가가 각본을 썼다.
'킬링 로맨스' 모험 각오한 도전
=조나단 역에 선뜻 이선균을 떠올리기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기생충'을 비롯해 진지한 얼굴을 흔히 떠올리기 마련인데, 어떤 점을 발견하셨는지요.
이선균은 정말 웃긴 배우예요. 제가 좋아했어요. (속삭이며)조나단은 이선균의 페르소나 같은 캐릭터예요. 무엇이든 엄청 열심히 하는 사람이죠. 매 역할이든 최선을 다하고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 속 박동훈이 조나단을 한다면 어떨까 궁금했어요. 드라마 3회 중간에 이선균이 출연한 잇몸약 광고가 나오는데, '문득 조나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은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거든요. 조나단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당'이에요. 주변에 많은데, 그들을 보면 다 이유가 있어요. 알고리즘(Algorithm)도 일종의 가스라이팅 아닐까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나오는 광고에 물건을 얼마나 많이 샀게요. 나도 모르게 타인을 조종하는 어떤 존재가 조나단이라고 봤어요.
=출연 제안을 하니 이선균씨는 뭐라던가요.
사실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찔러본 거예요.(웃음) 그런데 하겠다고 해서 고맙고 좋았어요. 제작자와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거든요. 농담으로 '우리 잘 안 되면 이민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해보자고 말했어요. 욕먹을 각오 하면서도 영화의 매력에 반해 모험을 시작했어요.
=어떤 점이 특히 모험이었나요.
남편을 처치하기 위해 여래와 범우가 나서는 설정이요. 이병헌 감독을 홍보해주긴 싫지만 제 인천 후배거든요.(웃음) 이 감독의 '바람바람바람'(2018)은 코미디 교본 같은 영화예요. 어색한 설정, 병맛, 말맛, 상황 개그 등 모든 종류의 코미디가 다 나와요. 소재의 불편함을 최선을 다해 뛰어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그 점이 저희에게도 도전이었어요. '킬링로맨스'는 동화로 가보자고 했죠. '만약'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상상력이 넓어지잖아요. 그래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한 거예요. 화자가 동화책 읽어주는 설정은 각색 과정에서 추가했는데, 블랙코미디의 전형이죠. 화자는 미국 트레일러에 사는 할머니로 설정했는데 땀복을 입고 나오는 데 재밌죠. 배우도 연기 경험이 없는 자연스러운 사람을 찾아서 섭외했어요.
=박정예 작가와 작업은 어땠나요.
박 작가님이 대본 정리하면서 입원까지 하셨어요. 작가님 집 앞에 매일 찾아가서 카페에서 만나서 대본을 정리했어요. 초고는 현실적인 대본이었는데, '여기까지 가보자'고 의견을 냈어요. 받아주고 잡아줘서 고마웠죠. '킬링로맨스'는 복 받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감독으로서 사람들한테 많은 걸 받았어요.
=여러모로 상업영화로 만들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셨을텐데, 감독님은 어떤 걸 하고 싶으셨나요.
저한테 극적인 대본만 연출 제안이 들어왔어요. 외계인이 방귀뀌면 다른 사람이 되는, 외계인 버전 '뷰티 인사이드' 같은 영화요. 이상한 설정에 이상함이 추가되니 투자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중국가서 영화하려고 갔더니 사드(THAAD)라고 나가래요. 북경 관광만 열심히 하다 왔죠.(웃음) 절실함도 있었어요. 이번엔 감독한테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고 해주셨어요. 물론 다 할 수도 없고 또 못했지만, 이런 작업은 처음이었어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극한의 병맛인 장면 일부를 걷어냈어요. 공명이 조금만 있으면 제대하는데, 그때까지 극장에 상영된다면 2시간5분짜리 '극열지옥'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공명씨는 순수한 범우와 잘 어울리더라고요. 어떻게 캐스팅하셨나요.
범우를 누가 할까 고민할 때였는데, 우연히 카페에서 공명을 만났어요. 격식 차리지 않고 해맑게 웃는 순수한 인상이 좋았어요. 정말 깨끗한 사람이구나 느꼈죠. 이선균과 '너 연기하지 마' '너 안 착하지?' 짓궂게 묻곤 했어요. 그런데 정말 순수한 사람 같더라고요. 사실 NCT가 누군지 몰랐는데, 공명 동생이라고 해서 또 놀랐고요.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서 더 바른 거 같아요.
홈쇼핑·행복·타조…현웃 터지는 비하인드
=촬영 기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발이 묶이셨다고요. 쉽지 않으셨겠네요.
서울 근교에서 웬만하면 거의 촬영하려고 했는데, 평창, 여수에서 찍는데 갑자기 셧다운됐어요. 현장에서 대본을 고치고 또 고쳤죠. 엔딩 장면 찍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돈도 별로 안 남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그 와중에 이선균과 홈쇼핑을 보는데 이선균이 쇼핑호스트를 보며 '어? 내 친구다!'라는 거예요. 홈쇼핑 설정으로 가져가도 괜찮겠다는 아이디어를 얻게 됐어요. 마술 같은 일이 많았어요.
=H.O.T.의 '행복'이 마치 관객에게 주술을 거는 듯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게 되셨나요.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노래를 들으면 언제나 행복해지거든요. 어떤 노래를 써야 악마의 마법 주문 같은 느낌이 날까 고민하던 때였죠. 이선균과 한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으면서 '행복 노래는 어떠냐'고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어요. 그때 옆에서 장우혁 씨가 냉면을 먹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이선균과 서로 아는 사이고요. 인사를 주고받고 계산도 해줬죠. 신의 뜻 같다, 그래서 쓰게 됐어요. 신기했어요.
=감독님의 '행복'은 무엇인가요.
마음 편하면 행복한 거 아닐까요. 소파에서 아무것도 안 할 때 가장 행복해요. 내가 보고 싶은 거 보고. 그게 진정한 행복 같아요. 상대적으로 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거 같아요.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 불행해져요.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다 문제가 있거든요. 똑같다고 생각해요. 아, 그리고 SNS를 많이 하면 안 돼요. 최근에 광고에 이끌려서 등 긁는 도구도 샀다니까요.(웃음)
=비의 '레이니즘'은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누가 제게 비의 '깡'이 유행해서 따라가려고 쓴 게 아니냐고 묻던데, 아니에요. 저는 '깡' 나오기 전부터 1일1깡을 했거든요. '레이니즘'은 자아도취 곡이잖아요. 버스 뒷좌석에서 그 노래를 들으면 버스가 내 것 같고, 어딜 가도 세상이 내 것처럼 느껴지죠. 여래가 느낀 행복의 순간과 닮았다고 봤어요. 가수 비가 노래를 적극적으로 불러주셔서 고마웠죠.
조나단이 무언가 강요하는, 주위에 흔한 악당이라면 여래는 거기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봤어요. 동화에서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고받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하고 끝나잖아요.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범우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남자라고 봤어요. 끝까지 보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고요. 타조는 섬에 사는 원주민을 상징하고 싶었어요.
=갑자기 타조가 등장하는 설정도 기발했어요. 특히 동화 같은 엔딩이 마음에 든다는 반응이 많은데요.
동물을 좋아해요. 하루는 타조 농장을 운영하는 후배가 초대해줘서 갔는데 문득 '타조는 왜 날지 못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찰나 영화를 하게 됐어요. 원래 하늘에 새들이 막 날아다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콘셉트가 명확해지면서 동화적인 느낌을 내고자 자신의 것을 빼앗겨 한이 맺히고, 말할 수 없는 이민자들, 원주민을 상징하고 싶었어요.
비틀고 무너뜨리며 느끼는 희열
='감독이 미쳤다' 'B급 영화'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시는지요.
어렸을 때부터 '꼴통' '또라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지만, 남한테 최대한 피해는 안 주려고 노력했어요. 비주류를 좋아해요. 영화는 늦게 배웠는데 60~70년대 영화에 푹 빠졌어요. 계급을 무너뜨리는 느낌이랄까요. 고상하고 완벽한 걸 무너뜨리는 재미가 B급 영화 아닐까요. 저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더라고요. 미국 국립대학 AFI에 다니다가 잘렸지만. 당시 도서관에서 온갖 영화를 보고 영향을 받았어요. 하루에 4편씩 봤죠. '열차 안의 낮선자들'(1951) '바바렐라'(1968)를 보고 매력을 느껴서 모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회사에 피치한 적도 있어요.
저는 B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에 B는 없다고 생각해요. 무언가 비틀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게 재밌어요. '킬링로맨스'도 기존 영화 공식을 다 비틀었어요. 변할 수 없고 정체된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변화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 주변에 악인들이 많은데, 안 됐으면 하는 악인도 잘 될 때가 있거든요. 아내가 늘 말해요 '나중에 그들은 벌 받을 거라고'요. 저는 믿고 싶은데, 더 잘 사는 거 같기도 해요.(웃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남사용'
=전작 '남자사용설명서'에서 오정세가 나체로 뛰어가는 장면은 지금도 생각해도 웃겨요.
빠질 뻔한 장면인데, 피디가 싸워서 찍게 된 장면이죠. 스케줄이 빨리 끝나서 시간이 절약돼서 조명 크레인을 빌려와서 급하게 찍은 장면이에요. 운이 좋았죠. '킬링로맨스'도 그런 영화예요. 오스카상 받으러 가는 길에 거절하러 온 사람(이선균) 붙잡고 '떴다방'처럼(웃음) 거절 못 하게 붙잡아서 설득했는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받았잖아요. 당연히 안 하겠거니 싶었는데 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오정세가 특별출연한 장면도 정말 재밌는데요, 흔쾌히 달려와 줬나요.
오정세랑 예전에 승재가 10년 후에 뭐 하고 있을까 이야기 나눈 적이 있어요. 아, 근데 엔딩에서 많은 관객이 오해한 거 같아요. 승재가 시상식에 상 타러 가는 게 아니었어요. 억울한 게 이시영이 칸 광고제에서 상을 타는 장면이었는데, 잘 표현이 안 된 거죠. 승재는 이후에 감독에게 빈대 붙어서 살다가 영화 몇 개 망하고 또 사업하다 망하지 않았을까. 찜질방도 망했을 거 같다 그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서 '킬링로맨스'에서 차용했어요. 특별출연 장면은 오정세가 바쁜 스케줄에도 가족들과 같이 와서 종일 찍어줬어요. 정말 열심히 해줬어요. 아웃 테이크들이 아까울 만큼 열연했죠. 정말 고마웠어요.
='남자사용설명서' 승재에 이어 '킬링로맨스' 여래까지. 주인공을 계속 인기 연예인으로 내세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직업 자체가 글래머하달까요. 화려한 직업이 재밌잖아요. 스타라는 직업이 계급은 아니지만, 그들의 삶이 현실보다 더 커 보일 수 있잖아요. 판타지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일부러 고르려고 고른 건 아닌데, 그런 대본도 많이 들어와요.
=2023년에 '남자사용설명서'가 태어났다면 100만 짤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킬링로맨스'에서도 지질한 몇몇 장면이 인상적인데요. 어떻게 착안하셨나요.
주변에서 '형이 말이지~' 라고 말하는 형들은 대부분 그래요. 엄청나게 부자형이 스포츠카를 태워준 적이 있었는데, 동승자가 실수로 '문콕'을 했는데 그걸 내려서 침으로 닦고 있더라고요. 또 다른 쿨한 형은 과속방지턱에서 내리라고 하거나. 그런 사람들이요.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질한 모습이 재밌어요. 학교에서 가르치잖아요. 영화의 대사는 반대다.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와 반대를 보여준다고요. 걱정 말라는 사람은 걱정이 많고, 뒤끝 없다는 사람은 뒤끝 작렬이죠. 저는 콤플렉스 덩어리예요. 모든 모습이 다 있어요. 사는 게 재밌어요 그래서.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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