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다리던 딸의 웨딩사진은 영정사진이 되고 말았다 [이태원참사_희생자]

소중한 2023. 4. 1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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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6시 34분] 엄마에게 첫 해외여행 선물, 유능한 공공시설물 디자이너 김수진씨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편집자말>

[소중한, 이희훈 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 유가족.
ⓒ 이희훈
 
엄마는 딸 사진을 앞에 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랑 한 약속 지켜야지, 왜 먼저 가버렸어?"

고 김수진(1993년생)씨는 "건축가가 돼 3층 집을 짓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1층엔 예쁜 카페를 차려 엄마와 알콩달콩 운영하고, 2·3층엔 본인과 엄마가 각각 살 공간을 마련한다는 게 수진씨의 꿈이었다.

"수진이는 그 꿈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어요. 엄마인 저도 그날을 기다리며 차곡차곡 준비해왔죠. 얼마 전부터는 '조금만 더 고생하면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 꿈이 사라져버렸죠."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 김씨가 참사 직전 결혼을 준비하며 찍은 웨딩사진.
ⓒ 유족 제공
 
수진씨는 또 다른 꿈을 희망하며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2023년 봄은 수진씨에게 결혼이란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진씨는 겨울의 문턱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숨지기 한 달 전에 찍은 웨딩사진은 분향소의 영정사진이 돼버렸다.

수진씨 엄마 조은하(55)씨와 이모 조소라(51)씨를 지난 8일 서울광장에 있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만났다.  

꿈만 같던 여행길  

"요술 붓이라도 든 듯 하얀 도화지 위를 너의 꿈으로 가득 그려 넣을 때 무척 신기하고 놀라웠단다. 네가 그린 멋진 그림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너에게 그리기상을 준다. 2000년 2월 23일 ○○어린이집원장 ○○○"

수진씨가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 받은 상장의 문구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수진씨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유치원 재롱잔치 안내문에 어린 수진씨의 그림이 실릴 정도였다. 초·중·고 시절 수진씨는 매년 미술과 관련된 상을 빼놓지 않고 받아왔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 엄마 조은하씨.
ⓒ 이희훈
 
"수진이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많이 미안해요. 형편이 넉넉지 못해 학원 하나 제대로 못 보냈거든요. 중학교 선생님들이 '수진이는 예고(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고 적극 추천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수진이도 '나 예고 갈 거야'라고 조르지 않더라고요. 본인도 엄마가 힘들다는 걸 알았겠죠. 하루하루 사는 것에 급급해 재능 있는 딸의 뒷바라지를 맘껏 해주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후회스럽습니다."
   
대학 졸업 때까지 전주에 살았던 수진씨는 7년 전 한 디자인회사에 취직하며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수진씨는 참사 직전까지 회사의 디자인팀장으로 일했다.

취직 후 수진씨는 엄마와 베트남 다낭으로 여행을 떠났다. 바쁜 삶 때문에 "여행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엄마는 딸 덕분에 생애 첫 해외여행을 만끽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엄마는 잠시나마 미소를 내보였다. 딸은 그 이후에도 매년 엄마 손을 잡고 여행길에 나섰다.

"딸과 함께한 첫 해외여행은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다음 해에 떠난 여행도, 그 다음 해에 이모들까지 함께한 제주도 여행도 너무 행복했죠. 제주도에 갔을 땐 겨울이었어요. 칼 같은 바람이 불어 정말 추웠는데도 바닷속 성게를 들여다보며 서로 잡겠다고 깔깔거렸던 그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아요. 거센 추위에 작은 풀빵을 나눠 먹던 그 시간 또한 너무 그립습니다.

제주도에 다녀온 후 꼭 다시 가서 1년 살이, 아니면 한 달 살이라도 하자고 약속했건만... 수진이는 고향인 전주에 내려오면 꼭 순댓국을 먹었어요. 수진이와 함께 전주의 이팝나무 철길을 꼭 다시 걷고 싶은데 이제 그럴 수 없어 서글프고 가슴이 아립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가 유치원 다니던 때부터 학창시절까지 받은 상장.
ⓒ 유족 제공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가 평소 그렸던 그림
ⓒ 유족 제공
 
의문투성이

2022년 10월 30일 오전 7시, 전날 고된 일을 마치고 깊이 잠들었던 엄마는 휴대전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딸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품고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딸 휴대폰인데 누구세요?"
"네, 여긴 용산경찰서입니다. 실종신고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실종신고요? 무슨 실종신고요?"
"압사 사고 현장에서 이 휴대폰을 습득했습니다."

"압사요? 압사가 뭔데요?"
"뉴스 안 보셨어요?"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 엄마 조은하씨.
ⓒ 이희훈
 
엄마는 TV를 켰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집안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도저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어 우선 수진씨 오빠와 이모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와 이모 소라씨가 오전 8시께 한남동주민센터(당시 실종자 접수처)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어느 누구도 두 사람에게 수진씨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병원 이송 정보를 안내한다는 전화번호도 무용지물이었다.

오후 1시가 돼서야 함께 기다리던 다른 가족이 "전화로 희생자 정보를 확인했다"고 알려왔다. 그제야 수진씨가 일산동국대병원에 안치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안실에서 처음 수진씨를 마주한 이모는 "찾았다고 안도해야 하는 것인지... 도저히 수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라고 한탄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 김씨가 참사 직전 결혼을 준비하며 찍은 웨딩사진.
ⓒ 유족 제공
 
장례 후 참사 당시를 되짚어 본 유족은 여러 의문을 품게 됐다. 우선 수진씨와 함께 이태원을 찾았던 남자친구(생존)에게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10월 29일 오후 10시께 이태원을 찾았다가 인파에 밀려 수진씨와 같이 넘어진 남자친구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근처에 깔려 있던 수진씨를 겨우 끄집어냈다. 그때가 오후 11시 정도였다. 그때까지 '의식은 없었지만 맥은 뛰고 있었다'는 게 남자친구가 기억하는 수진씨의 상태다.

남자친구는 다른 여성과 함께 CPR을 진행했다. 얼마 후 구급대원이 와 수진씨 상의를 자르고 자동심장충격기(AED)를 연결하려 했지만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구급대원은 잠시 뒤 들것을 가져와 수진씨를 구급차로 데려갔다. 남자친구가 구급차에 함께 타겠다고 했지만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직 수진씨 맥이 뛰고 있었기에 남자친구는 당연히 병원으로 옮겨질 줄 알고 서울 시내 응급실 곳곳을 헤맸다. 하지만 어디서도 수진씨를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야 엄마는 구급차에 탄 딸이 병원이 아닌 원효로다목적체육관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그리고 10월 30일 오전 4시께 경찰에 의해 이미 신원확인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 엄마 조은하씨는 서울광장 분향소의 딸의 영정 앞에 서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 이희훈
 
"아무리 생각해도 왜 체육관으로 옮겨졌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맥이 있었다는 아이가 왜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사망자나 지연환자(생존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있던 체육관으로 간 걸까요. 다른 이태원 참사 유족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당시 체육관으로 옮겨진 희생자의 경우 얼굴까지 천을 덮거나 가슴에 'N'자를 새겼다고 해요. 우리 수진이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혹시나 수진이가 체육관 바닥에 내팽개쳐져 외롭게 세상을 떠난 건 아닌지 너무 가슴이 아립니다. 행여 구급차 안에서 생을 마감했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덜 슬퍼하지 않았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엄마의 의문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오전 4시께 경찰이 수진씨의 신원을 확인했음에도 유족은 오후 1시가 돼서야, 그것도 직접 전화로 조회해서야 수진씨의 행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대는 오전 4시에 체육관에서 (희생자들의) 신원확인을 끝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오후 1시에야 수진이가 일산동국대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도대체 (경찰은 오전 7시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왜 실종신고를 하라고 한 건가요. 임시 안치를 위해 체육관으로 희생자를 데려갔다면 신원확인 후 곧바로 가족이나 지인에게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랬다면 저희뿐만 아니라 많은 유족이 그토록 아이를 찾아 헤매지 않았을 겁니다. 체육관에서 신원확인 외에 또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엄마는 "검사가 부검을 거론한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다"고 떠올렸다.

"저는 내성적이라 남 앞에서 목소리 내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저 내 삶이 바빠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며 살아왔습니다. 처음엔 제게 가장 소중한 딸을 잃고서도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를 마약범죄자 다루 듯했던 국가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선 조여 오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거리로 나서는 것, 하나도 힘들지 않아"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의 엄마 조은하(왼쪽)씨와 이모 조소라씨가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이희훈
 
참사 후 엄마는 "영혼 없이 몸만 둥둥 떠다니는 공허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이모 소라씨 또한 "수개월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요즘은 잠을 자더라도 꿈속에서 깊은 슬픔을 느끼며 울다가 잠에서 깬다"고 말했다.

"제 삶의 원천이었던 딸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요. 오늘이라도 대문을 열고 '엄마 나 왔어!' 하고 웃어줄 것 같은데, 그리고 잔소리도 늘어놓을 것 같은데 말이죠."

엄마는 딸이 보고 싶을 때마다 추모관, 전주분향소, 서울분향소 오간다. 다른 유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엉망이 돼버린 삶에서 그래도 유족들을 만나면 잠깐씩 웃기라도 합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고통을 알고 위안을 느끼는 것이죠. 갑자기 웃어도,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도 서로를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편합니다. 서로 안고 울고 웃으며 서로를,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분노를 표출하면서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다 보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집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 엄마 조은하씨.
ⓒ 이희훈
 
엄마는 "이태원 참사 유족을 아예 외면하고 있다"며 윤석열 정부를 강하게 지적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현 정부가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에 따르면 재난을 비롯한 국가 위기관리의 컨트롤타워는 국가안보실과 대통령실입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재난 대응이 대통령실의 업무가 아니라고 회피합니다. 유족을 아예 외면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지자체는 압사 참사 재발을 막겠다면서 보차혼용(인도와 차도 구분 없는) 도로인 평지에 미끄럼방지 포장재를 쏟아 부어 '레드로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컨테이너 몇 개를 두고 골목에 사람이 몰려 있는 상황을 가정해 사다리와 그물을 이용한 구조 훈련을 했답니다. 유족과 국민이 저런 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런 걸 재발방지 대책이라고 진행하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행태가 계속된다면, 그리고 참사 현장의 실무자에게만 책임을 묻고 끝낸다면 대한민국은 앞으로의 재난에 대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독립적 조사기구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민동의청원'에 5만 명이 동참했습니다. 10일 만에 목표 인원을 채웠습니다. 이들의 염원은 정확한 원인 규명으로 이어져 그에 맞는 재발방지책이 나와야 합니다.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을 합해 원통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정부를 향한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더는 어이없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행동하고자 합니다. 재난을 예방·대응할 수 있는 능력 있고 안전한 나라에서 아이들이 성장하길 소망합니다. 비록 제 아이는 떠났지만 우리에겐 또 다른 아이들이 있고 이들만은 꼭 지키고 싶습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와 어머니 조은하씨가 전주 이팝나무 철길에서 찍은 사진.
ⓒ 유족 제공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가 어머니·이모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 중 찍은 사진.
ⓒ 유족 제공
 
<지난 2월 친구 재린씨가 쓴 편지>

수진이에게.

널 못 본 지 벌써 100일이 넘었다, 수진아. 그곳은 어때? 꿈에 여러 번 나올 법도 한데 네 귀차니즘을 누가 따라가겠어. 꿈에서 얼굴 한 번 비췄으니 이젠 안 나와 주는 건지, 잘 살고 있으니 찾지 말라는 건지.

최근에 서울 사는 친구들끼리 바다 보러 대부도에 다녀왔어. 네가 좋아하는 해산물 잔뜩 먹을까 했는데 막상 가니까 못 먹겠더라. 바다에서 3명이서 사진을 찍었는데 우리는 왜 항상 왼쪽을 비워두고 사진을 찍을까 몰라. 네가 같이 왔을 거라고 늘 생각하나봐. 그 사진을 보고 또 마음 한편이 허전했어.

보고 싶은 우리 수진이. 남당항도 같이 가고 대게도 먹자고 했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가버렸냐 진짜. 아직 우리 할 게 너무 많고 누릴 것도 너무 많은데.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신이 있다고 믿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산 너인데 왜 하필 너였냐고 신에게 따지고 화를 낸 적이 있어.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했는데 결국 넌 여기 없고 나 혼자 또 슬퍼해야 하더라. 더 슬퍼하기 보단 널 잊지 말고 마음에 새기자고 굳기 마음먹고 살아. 내가 힘들 때 술 한 잔 기울이며 차분히 이야기 들어주고 현명하게 답해줬던 네가 너무 생각나. 가끔 집에서 소맥을 타먹는데 아무리 마셔도 네가 타주는 맛이 안 난다.

3월에 전주에 가면 오로지 널 보러 전주에 가려고. 가서 허심탄회하게 내 이야기를 할 거야. '시끄러 이년아' 해도 끝까지 구구절절 이야기 할 거야. 위에서 잘 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라도 잘 살라"고 좀 해줘라. 보고 싶어 진짜, 진짜. 또 편지 쓸게 수진아.

<친구 새롬씨의 편지>

언니 나 새롬이야.

언니를 떠나보내고 하루하루 얼마나 언니 생각이 났는지 몰라. 사회 초년생에 언니를 처음 만나 6년 간 꾸준히 만나며 재밌게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 언니랑 같이 망원동에서 영상 찍으며 데이트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언니랑 놀러 다녔던 장소만 가도 언니가 떠올라. 너무 보고 싶다.

회사 끝나고 같이 만나 맥주 한 잔 하면서 재밌게 얘기했던 추억들이 계속 당연할 줄만 알았는데 이젠 그러질 못하니까 너무 슬프고 아쉽기만 해. 언니란 사람을 만난 건 내게 너무나도 큰 행복이었고 행운이었어. 나랑 늘 친하게 지내고 재밌게 놀아줘서 고마웠어, 언니.

다음 생이 있다면 우리 그때 꼭 다시 만나 이번 생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 사랑해 언니. 꿈에서 만나!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수진씨가 봉안돼 있는 추모관.
ⓒ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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