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훔칠 만큼 고달팠지만 비취색을 보면 아련"
[최방식 기자]
"상감청자 비취색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입니다. 아홉 살 때 돌아가신 엄마 색깔이지요. 첫 도자비엔날레를 치르며 깨달았습니다. 고달픈 줄 알면서도 내가 왜 아내(당시에는 연인)까지 꼬드겨 도예의 길에 들어섰는지요. 상처뿐이지만, 천년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고 미래세대에 전할 수 있게 된 건 분명 영광 아닐까요. 도예인의 사명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죽는 날까지 물레를 돌려야지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열한 번째 주인공 권혁용 청자 도예가(71·남)의 말이다. 12일 저녁 여주 가남읍에 있는 그의 작업실 '운곡청자'에서 만난 권 작가는 도예가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신이 익힌 상감청자 기법을 만천하에 공개해 지구촌 최고의 문화유산을 후대에 널리 전하겠다고 했다.
▲ 청자 도예가 권혁용씨. |
ⓒ 최방식 |
'싸리산' 자락 태어나... 도예가 운명?
"고달팠죠. 수없이 만들고 부수며 익혔죠. 재료가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고요. 흙을 못 구해 훔치기도 했죠. 가족을 팽개치고 도자에 몰입했지요. 비취색을 보면 아련했어요. 엄마 품에 안긴 듯. 마음이 차분해졌고요. 그 통에 아내와 세 딸들이 고생 많이 했죠."
그의 고려 상감청자는 사모곡인 셈. 속요(고려) '사모곡'의 "아 님아, 어머니같이 날 사랑하실 분이 없도다"(고려사 악지)는 구절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고려 비색(翡色)은 천하제일"(수중금(袖中錦)에서)이라는 남송 한 학자의 평가, "옥빛이 푸른 하늘에 비치니 내 눈까지 맑아진다"(목은시고)는 고려말 이색(청자 술잔을 선물로 받고)의 시구가 청아하다.
권 작가는 여주 현암리 싸리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국내 최고의 도자 고을인 여주. 그 중 최고의 도자 흙 터전인 싸리산. 일제는 강점기 때 그 산을 조선(아니 세계) 최고의 도자 흙산이라고 했단다. 그는 도예가의 숙명을 타고 났던 걸까.
▲ 권 작가가 상감청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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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도예가 숙명은 중학교 시절 바람처럼 다가왔다. 아버지가 재일교포 자금 지원을 받아 도자기 제작업을 시작한 것. 그 바람에 서울로 이사까지 했다. 도공을 고용해 사업했다. 돈 벌이가 잘 됐지만, 사업은 시작한 지 7년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중단됐다.
부친의 도예 사업을 곁눈으로 지켜봐온 그는 군 제대 뒤 홀로 고향 여주로 내려와 외삼촌이 하는 도예공방에 나가게 됐다. 비록 권유로 시작했지만, 우연찮게 공방(도자)에 다니며 도예가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사무나 영업은 도와줄 수 있지만요. 할 거면 제대로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안병린 3대 여주도자기조합장에게 찾아가 기초부터 배울 테니 가르쳐 달라고 했죠. 외삼촌이 체계적 공부를 한 분이 아니다 보니."
▲ 상감투각기법으로 만든 연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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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대회 금상, 도자비엔날레 대박
"경기 민예품경진대회에서 86년 금상을 받았어요. 76년부터 10년여 출품한 게 열매를 맺은 것이죠. 그보다 한 해 앞선 85년 외삼촌으로부터 독립해 개인 작업장도 열었습니다. 돈이 없어 작은 아버지에게 호소했더니 땅을 3백여평 주셨어요."
땅만 덩그러니 받아놓고 보니 다음이 문제였다. 건물 시설 등을 마련할 돈이 없었으니까. 친구들이 하나 둘 벽돌, 나무, 노동 기부로 도움을 줬다. 철공소를 운영하는 후배 한 명은 가마시설(가스)을 지원했다. 나중에 갚으라는 조건으로.
"개인 작업실을 열고 사업을 해봤지만 빚만 1억 원을 떠안았죠. 청자 도예가 쉬운 게 아니었거든요. 기술적으로도 백자에 비해 어렵고, 상업적 환금성도 떨어졌고요. 작품 채택 수율도 50%정도 밖에 안 됐거든요."
죽으라는 법은 없던가. 고생고생 하던 그에게 찬란한 빛이 찾아들었다. 2001년 1회 도자기엑스포에 참여했는데, 대박이 터진 것. 평판이 좋았는지 그의 작품을 사겠다는 이들이 줄을 섰다. 빚을 다 갚고 자동차 등 살림살이까지 마련하게 됐다.
▲ 상감청자 여러 소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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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다마라고 했던가. 7~8년 잘 나가나 싶었는데, 시련이 찾아들었다. 기르는 고양이를 부르는 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던 것. 병원 진단은 뇌졸중. 결국 서울의 한 종합병원을 찾아 정밀진단 결과 뇌종양 통보를 받았다.
"뇌하수체 인근에 종양이 생겨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죠. 워낙 위험한 부위이다 보니 후유증이 불가피 한 수술이었어요. 그 결과 지금까지도 음식·피부 알레르기, 소화·호흡 장애, 내분비물질 이상 등의 증상을 달고 살아요."
어렵고 힘들다는 청자 도예의 길에 들어선 걸 후회한 적 없냐는 질문에는 손사래를 쳤다. 앞 다퉈 상업 청자를 하는 걸 보며, 그는 "진짜 고려 상감청자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기에. 문헌을 뒤적이고 실험을 거듭하며 비취색을 찾아갔다.
"상감청자의 고향인 강진을 가려면 그때엔 이삼일 걸렸어요. 현지인들의 외면도 당연했고요. 흙을 훔쳐 제 유약으로 실험해봤는데 비취색을 얻을 수 없었어요. 포기하고 나만의 흙을 찾아 나섰죠."
그의 비취 청자와 현대적 문양(유색)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2011년경 그의 작품을 보고 간 미국 보스턴의 한 사업자가 3백여점을 구매해 현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일본 히로시마의 한 사업자는 3년여간 7백여점을 구매해 현지에서 판매했다.
중국 경덕진 초대전(국제도자박람회) 5점 출품, 독일 헤센주 한 미술관 3점 기증 전시, 영국 맨체스터 청자 다기 2개 기증, 청도 총영사관 2점 판매 전시, 중국 산둥성 2점 판매 전시 등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아빠 작품 멋져, 나는 안 해"
'청자 인생'을 작가는 회안과 보람의 교차라고 평했다. 반려자(조각 담당, 결혼 전부터) 아내의 "뭐 이런 걸 해서 식구를 생고생시키냐"던 푸념, "엄마 아빠의 작품 정말 멋져"라면서도 "난 절대 안 해"라는 세 딸의 선언을 잊지 못한다.
계획을 묻자, 평생 공부해 얻은 청자 도예 이론과 기술을 정리 중이라며 자신이 더 이상 물레를 돌리기 어려울 때쯤 후배들에게 공개(공유)할 예정이라고 했다. 자신의 삶과 정신을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런다고. 제자(최창석 바우가마 대표)와 싸리산 도자원료지도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고려의 파란꽃' 평가(한국 미학·미술사 토대를 만들었다는 미술사학자 고유섭)를 받는 상감청자. 그 따뜻하고 고요함이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아를의 여인' 2모음곡 3악장 '미뉴엣'(친구 귀로가 비제 사후 완성) 플루트 연주를 연상케 한다. 알퐁스 도데의 동명 희곡을 주제로 한 음악. 맑고 청아한 선율이 상감청자 비취빛 그리움을 잘 표현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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