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만 있냐고요? '축라밸'도 있습니다 [언젠가 축구왕]

이지은 2023. 4. 1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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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3회 경기 직관, 축구 몰입해 이성과도 멀어져... 지속 가능한 축구 생활을 위하여

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이지은 기자]

눈이 즐거운 요즘이다. 부상으로 축구를 쉬는 아쉬운 마음을 그러모아 공을 차는 경기라면 어디든 무조건 다 찾아다닌다. 지난 일요일에는 남성 풋살 경기인 FK 슈퍼리그 마지막 경기를 직관하러 제천에 있는 풋살구장에 다녀왔다. 그다음 주 화요일에는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우루과이전을 직관했다. 같은 주 금요일, 여성 축구 리그인 WK리그 개막을 맞이했고,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서울시청 대 경주한수원의 경기를 관람했다.

풋살 경기든 축구 경기든, 남자 경기든 여자 경기든 상관없다. 풋살은 스피드가 빠르고 화려한 개인플레이가 많아 보는 눈이 즐겁고, 축구는 드넓은 경기장에서 다 함께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는 재미가 있다. 남자 축구에서는 무적의 피지컬과 거친 플레이를 눈에 담아가고, 여자 축구를 볼 때는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저런 화려한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품는다(물론 할 수 없다).

남자보다 축구가 좋아
 
▲ 여자 축구 직관 서울시청 대 경주한수원 경기. 시작 전 인사.
ⓒ 이지은
같이 경기를 관람하러 간 축구 친구 연지에게 물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축구 직관하는 이런 나, 어떤 것 같아?"
"언니는 축미녀야. 축구에 미친 여자."

요즘에는 '미쳤다'는 표현이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많이 쓰이니까, 칭찬해준 거겠지?

일 외에는 축구밖에 없는 요즘이다. 심지어 예능도 축구 예능인 '골 때리는 그녀들'만 보고, 유튜브도 '풋살연맹' 등 각종 축구와 풋살 콘텐츠 위주로 두루 살핀다. 심지어 지금 연재하는 이 글조차 축구 글 아닌가? 물론 축구에 둘러싸인 매일이 충분히 즐겁지만 삶의 균형이 깨진 것 같아 마음 한쪽이 불안하기도 하다.
 
▲ 0대0으로 끝나고만 경기 늦은 밤까지 이루어진 치열했던 경기는 결국 0대 0으로 끝났다.
ⓒ 이지은
얼마 전, 내게 호감을 느낀 이성이 다가온 적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지금 뭐해?"를 물었고, 나는 연거푸 "축구해"라고 대답했다. 그가 "지금 만날래? 그쪽으로 갈게"라고 말을 걸 때마다 피곤하거나 귀찮았다.

이미 축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는데, 축구 끝나고 만나자고? 무엇보다 이성보다 축구가 더 좋았다. 결국 나는 그에게 "미안해. 나는 아직 누굴 만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라는 말을 건네었다.

"괜찮아. 나도 축구하는 여자 별로야."

뭐라는 거야. 나도 축구 안 하는 남자 별로야! 그렇게 그와의 관계는 정리되었다.

그가 건네던 친절들은 이미 기억에서 멀어졌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 마지막 비난의 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여자친구를 PC방에 데려가 옆에 한참 앉혀놓고 주구장창 본인 좋아하는 게임에 집중하는 애인, 조기축구나 야구 참가하느라 주말 내내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원망하며 집에서 혼자 아이를 돌보는 아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런 남자와 대체 왜 만나' 중얼거리며 혀를 끌끌 찼는데,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아예 이성을 곁에 두지 않고 축구만 찾아다닌다는 것 정도?
 
▲ 우루과이전 현수막 우루과이전 한쪽 벽에 붙어 있는 거대 현수막.
ⓒ 이지은
축구와 삶의 균형을 위하여

남들은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일명 워라밸을 고민한다면 나는 '축구 앤 라이프 밸런스', 즉 축라벨을 생각해볼 때가 온 것 같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 앞으로 오래오래 달리려면 지금부터라도 축구와 삶의 균형을 맞춰보아야겠지.

흔히 워라밸이 깨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일이 좋아서, 일에 집중하다가 생긴 결과였을 것이다. 세상 만물 가운데 그나마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일' 아닌가. 부모도 자식도 연애도 결혼도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일만큼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어느 정도 따라온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일에 집중하게 되고, 집중하다 보니 성과가 생기고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오르고, 인정받는 게 좋아서 다시 일에 집중하고. 이 사이클에 중독되면 관계든 건강이든 삶에 이상이 오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공을 차다 보니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그게 기꺼워 자꾸만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쉬는 시간 없이 달리기만 하다 보니 결국 근육에 과부화가 와버려 주저앉은 것이다.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 우루과이전 직관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우루과이전.
ⓒ 이지은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 따르면, 워라밸을 지키기 위해서는 1.경계선을 확실히 긋고, 2.근무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며, 3.건강을 지키고, 4.회복력과 수면의 질을 높여야 하며, 5.우선순위를 챙기라고 한다.

이를 축라밸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1.일과 축구, 휴식의 경계를 확실히 정하고, 2.일주일에 3회, 6시간 이상 공을 차지 않는다(더 줄일 순 없어!), 3.축구 시간을 줄여 건강을 챙기며, 4.축구가 끝나면 충분한 휴식과 수면을 챙기고, 5.축구를 줄인 시간을 그 외에 인간관계와 우리집 고양이에게 쓰는 것.

처음에는 축구를 줄이는 삶이 걱정되기도 했다. '나 이거 빼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싶어서. 축구를 좋아하는 마음을 줄일 수 있을까?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제는 안다. 오래 함께하려면 천천히 가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축구를 덜 하는 게 축구를 덜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워라밸을 생각하는 이들은 사실 일을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더 오래 계속 일하고 싶어서, 근근이 지속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나 역시 더 오래 계속 축구하고 싶어서, 근근이 지속하는 축라밸을 약속하기로 한다. 축구왕으로 가는 길은 조금 더 멀어졌지만, 이는 돌아가는 길이 아닌 정석으로 향하는 방법이다.
 
▲ FKL 남성 풋살 경기 제천 풋살경기장에 있었던 슈퍼리그 경기.
ⓒ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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