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만 있냐고요? '축라밸'도 있습니다 [언젠가 축구왕]
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이지은 기자]
눈이 즐거운 요즘이다. 부상으로 축구를 쉬는 아쉬운 마음을 그러모아 공을 차는 경기라면 어디든 무조건 다 찾아다닌다. 지난 일요일에는 남성 풋살 경기인 FK 슈퍼리그 마지막 경기를 직관하러 제천에 있는 풋살구장에 다녀왔다. 그다음 주 화요일에는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우루과이전을 직관했다. 같은 주 금요일, 여성 축구 리그인 WK리그 개막을 맞이했고,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서울시청 대 경주한수원의 경기를 관람했다.
풋살 경기든 축구 경기든, 남자 경기든 여자 경기든 상관없다. 풋살은 스피드가 빠르고 화려한 개인플레이가 많아 보는 눈이 즐겁고, 축구는 드넓은 경기장에서 다 함께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는 재미가 있다. 남자 축구에서는 무적의 피지컬과 거친 플레이를 눈에 담아가고, 여자 축구를 볼 때는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저런 화려한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품는다(물론 할 수 없다).
▲ 여자 축구 직관 서울시청 대 경주한수원 경기. 시작 전 인사. |
ⓒ 이지은 |
"일주일에 세 번씩 축구 직관하는 이런 나, 어떤 것 같아?"
"언니는 축미녀야. 축구에 미친 여자."
요즘에는 '미쳤다'는 표현이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많이 쓰이니까, 칭찬해준 거겠지?
▲ 0대0으로 끝나고만 경기 늦은 밤까지 이루어진 치열했던 경기는 결국 0대 0으로 끝났다. |
ⓒ 이지은 |
이미 축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는데, 축구 끝나고 만나자고? 무엇보다 이성보다 축구가 더 좋았다. 결국 나는 그에게 "미안해. 나는 아직 누굴 만날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라는 말을 건네었다.
"괜찮아. 나도 축구하는 여자 별로야."
뭐라는 거야. 나도 축구 안 하는 남자 별로야! 그렇게 그와의 관계는 정리되었다.
▲ 우루과이전 현수막 우루과이전 한쪽 벽에 붙어 있는 거대 현수막. |
ⓒ 이지은 |
남들은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일명 워라밸을 고민한다면 나는 '축구 앤 라이프 밸런스', 즉 축라벨을 생각해볼 때가 온 것 같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 앞으로 오래오래 달리려면 지금부터라도 축구와 삶의 균형을 맞춰보아야겠지.
흔히 워라밸이 깨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일이 좋아서, 일에 집중하다가 생긴 결과였을 것이다. 세상 만물 가운데 그나마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일' 아닌가. 부모도 자식도 연애도 결혼도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일만큼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어느 정도 따라온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일에 집중하게 되고, 집중하다 보니 성과가 생기고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오르고, 인정받는 게 좋아서 다시 일에 집중하고. 이 사이클에 중독되면 관계든 건강이든 삶에 이상이 오는 것이다.
▲ 우루과이전 직관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우루과이전. |
ⓒ 이지은 |
이를 축라밸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1.일과 축구, 휴식의 경계를 확실히 정하고, 2.일주일에 3회, 6시간 이상 공을 차지 않는다(더 줄일 순 없어!), 3.축구 시간을 줄여 건강을 챙기며, 4.축구가 끝나면 충분한 휴식과 수면을 챙기고, 5.축구를 줄인 시간을 그 외에 인간관계와 우리집 고양이에게 쓰는 것.
처음에는 축구를 줄이는 삶이 걱정되기도 했다. '나 이거 빼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싶어서. 축구를 좋아하는 마음을 줄일 수 있을까?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제는 안다. 오래 함께하려면 천천히 가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축구를 덜 하는 게 축구를 덜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 FKL 남성 풋살 경기 제천 풋살경기장에 있었던 슈퍼리그 경기. |
ⓒ 이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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