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배게이트 前史]③물 위에선 법조기자, 물 밑에선 로비스트

2023. 4.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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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김만배(58)는 대장동 사건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검찰, 법원, 정치권이 모두 그의 입에 주목하고 있다. 김만배의 공식 직업은 기자였다. 1992년에 기자로 입문해 대장동 사건이 터질 때는 경제지 부국장대우 기자로 활동했다. 김만배가 현직 기자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수천억원대를 주무르는 부동산 시행업자 생활을 이중으로 할 수 있었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김만배의 시행업자 입문 전 행적과 대장동 사업권을 손대기까지 행적을 취재했다.

대장동 개발 사업 비리 의혹의 중심 인물인 김만배는 법조 기자들 사이에서는 ‘사람 좋은 형’으로 통했다. 기자실에서 후배 기자들을 마주치면 얼굴을 쳐다보면서 “밥은 먹었어?” 한 마디라도 인사를 건네고 지나갔다고 그와 같은 시기 법조를 출입했던 모 중앙 일간지 기자는 전했다. 매너도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사실은 ‘호수 위의 백조’였다. 물 위에선 서글서글한 태도와 두둑한 지갑으로 동료 기자들과 고위직 판검사 등 법조계 인사들의 호감을 샀지만, 물 밑에서는 쉴 새 없이 물갈퀴를 저으면서 거대한 이권을 쫓아다니며 ‘대장동 비호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김만배는 횡으로 법조 출입기자와 친분을 쌓고, 종으로는 검찰 간부, 법원 간부와 인맥을 쌓으면서 자신의 로비력을 구축해나갔다. 중앙, 한국, 한겨레 등 주요 언론의 중진 간부 기자와 큰 액수의 금전거래를 한 사실도 드러났다. 김만배와 거액을 주고 받은 세 명의 기자는 모두 법조기자 출신으로 법조 출입 때 김만배와 교류하기 시작해 오랫동안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시아경제는 김만배가 2004년 법원, 검찰청이 자리잡은 서울 서초동에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 대장동 로비스트로 본격 활동한 2016년까지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를 객관적인 사실과 증언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법조 출입기자로 변신한 김만배(2004~2007년)

김만배의 소속 언론사였던 머니투데이가 법조팀을 처음 만든 시기는 2004년 6월로 확인된다. 당시 머니투데이는 법조 기자실 출입요건에 따라 뉴시스 경력기자 4명을 한꺼번에 채용해 법조팀을 꾸렸다. 이때 김만배가 차장급 법조팀장으로 머니투데이에 입사했다. 당시 머니투데이 편집국장으로 있었던 홍선근 회장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법조팀 신설 배경에 대해 “경제 분야에서도 당사자간 분쟁 등의 비중이 크고, 법조가 빠지면 한참 달려나가다가 끊기는 인상이 있어 전체 모습을 독자에게 보이기 어렵다”면서 “경제를 다루려면 법조를 보강할 필요가 있다. 파산 등 경제 분야에 주안점을 두고 머니투데이만의 개성을 담은 특화된 법조 뉴스를 제공하겠다”고 설명했다.

법조기자단은 신설 언론매체가 가입하는 데 문턱이 높기로 유명하다. 특히 1차 관문으로 불리는 대검·지검·지법 기자실을 출입할 수 있게 되더라도, 일정 기간 서울지법·서울지검·대검을 먼저 출입한 뒤에 대법원 기자단 가입을 위한 출입투표를 다시 거쳐야 한다. 김만배가 속했던 머니투데이 역시 대법원 입성이 쉽지는 않았다.

2006년 법조기자단에 1차 가입한 머니투데이는 2007년 대법원 기자단 가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2008년 대법원 기자단 가입 투표를 할 당시 A방송사와 함께 투표를 실시했는데, A방송사는 가결 정족수를 충족해 통과가 됐지만 머니투데이는 탈락했다. 당시 법조를 출입 했던 B씨는 “그때 김만배가 투표 결과에 크게 반발했다. 혼자 통과한 A방송사 선배가 너무 민망하고 미안해 하면서 기자단에 ‘우리 입장이 곤란한데 한 번 더 투표를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간곡히 요청을 했다”며 “그게 받아들여져 실시한 재투표에서 머니투데이가 통과돼 A방송사와 함께 기자단에 가입하는 것으로 처리됐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머니투데이는 이후 꾸준히 법조팀 인원을 늘리며 서초동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경제지의 경우 보통 3~4명, 많아야 5명 정도로 팀을 꾸린다. 하지만 머니투데이는 김만배 법조팀장 밑에 기본적으로 6명 이상, 많을 때는 8~9명을 배치, 넉넉한 가용 인력을 제공했다.

“지갑엔 늘 200만원” 언제부터 씀씀이 커졌나(2008~2012년)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본지 ‘김만배게이트 전사(前史) 1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회사를 옮겨 서초동에 처음 나올 때부터 법조팀장을 맡았던 김만배는 기사를 많이 쓰지 않았다. 본인의 기명 칼럼 몇 편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사는 법조팀 후배들과 공동 바이라인(취재기자 이름)을 넣고 쓴 기사이다. 다만 언론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팀원들이 충분히 있었던 만큼 팀장이었던 김만배가 직접 기사를 쓸 필요가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신 오랜 기간 법조를 출입하며 쌓은 판검사들과의 인맥을 이용한 이른바 ‘고공 취재’를 통해 후배들에게 기사 소스를 제공하고, 써야될 기사들을 할당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취재 능력이나 기사 작성 능력에 대해서는 미심쩍어하는 기자들이 적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후배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 면에서 김만배는 여느 다른 언론사 팀장들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그가 팀장 시절 팀 회식 때 후배들을 비싼 뷔페에 데려갔다거나, 회식을 마치고 후배들에게 넉넉하게 택시비를 챙겨줬다는 일화는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회식이 끝나면 경기도 등 서울 외곽까지 가야 하는 후배에게 택시비로 10만원을 챙겨주기도 했다. 특히 그는 서초동 인근에 사비로 오피스텔을 얻어서 후배 기자들이 취재 도중에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제공했다고 전해졌다.

그의 씀씀이를 알 수 있는 일화는 또 있다. 2009~2010년 무렵 C방송사 소속으로 서울지검을 출입했던 D씨의 기억이다. 김만배가 C방송사의 아침 프로그램에 출연한 날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나오는 김만배와 마주친 D씨가 감사 인사를 건네자 김만배가 “서초동으로 가야 되는데 좀 태워달라”고 제의했다. 함께 차를 타고 서초동으로 이동하며 D씨가 “제가 나중에 식사를 한 번 모시겠습니다”고 하자 김만배가 “밥을 사면 내가 사야지, 너한테 얻어먹겠냐. 형 돈 많아”라고 얘기하면서 지갑을 꺼내 보여줬다. 언뜻 보기에도 지갑이 잘 닫히지 않을 정도로 두툼했다. 놀란 D씨가 “형님 1000원짜리 아닙니까”라고 묻자 김만배가 “봐라”라고 하면서 장지갑을 열어 보여줬는데, 지갑 안에는 100만원짜리 수표 1장과 10만원짜리 수표 여러 장, 그리고 5만원권 신권이 가득 들어 있었다. D씨는 “그때 만배형이 자기는 주머니에 항상 200만원씩 넣고 다닌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다만 김만배가 처음부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2009년 무렵부터 서초동에는 ‘김만배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200억원대 땅이 있다’, ‘집에 돈이 많아서 기자는 취미로 하는 것이다’ 등 그의 재산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고, 그런 소문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2010년대 초반까지도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주변 지인들로부터 적게는 몇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까지 돈을 빌렸다가 갚았다는 증언이 있다. 자신이 식대를 부담해야 하는 식사 자리를 일부러 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증언도 들렸다. 또 몇몇 대기업 홍보담당 임원이 김만배로부터 오너 관련 법조 동향 정보를 청취하는 대가로 김만배가 후배들에게 밥을 사면 나중에 후결제해주는 방식으로 김만배의 인맥관리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던 김만배가 남에게 기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자기 돈을 통 크게 쓰기 시작한 시기는 남욱 변호사가 주도하던 대장동 세력에 본격 합류한 2014년 이후와 겹친다. 대장동 사업 자금으로 김만배가 금전적 여유가 생겼으리라고 짐작되는 부분이다. 대장동 스토리를 잘 아는 남욱 지인의 설명과 언론 보도된 서울중앙지검의 김만배 등에 대한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공소장 내용 등을 종합하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당초 대장동 프로젝트 설계자였던 남욱 변호사는 큰 돈을 벌 판은 다 짜 놓았는데, 막상 인허가권자인 이재명 성남시장과 별 친분이 없었다. 남욱은 2014년 수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김만배에게 대장동 사업 합류를 권유했다. 그 시절 김만배는 부동산 개발은 잘 몰랐고, 처음에는 ‘이재명 로비스트’로 투입된 것이다. 그의 공식 직업이 여전히 머니투데이 법조팀장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김만배는 그해 8월 당시 이재명 시장의 최측근이던 유동규에게 “(원래 대장동 민간 사업인) 서판교터널을 성남시 돈으로 뚫어달라”고 요청했다. 서판교터널은 대장동 도로망의 핵심이다. 한달 뒤 이재명 시장은 대장동 사업 중간보고회에서 이 터널을 대장동 민간 사업에서 빼고 성남시 예산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서판교터널이 빠지면서 직간접적으로 대장동 프로젝트 사업비가 대폭 감소했다. 지출해야 하는 사업비가 줄어들면 외부 투자 유치가 쉬워지는 건 당연하다. 김만배의 화천대유는 이듬해인 2015년 투자자문사에서 291억원을 빌렸다.

로비스트가 된 법조 출입기자(2012년 이후)

김만배가 법조팀장으로 근무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법원·검찰 내 인맥도 점차 확대됐다. 그와 같은 시기 법조를 출입했던 타사 기자들은 그가 기사를 많이 쓰진 않았지만 수시로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 서울중앙지법 등에 모습을 나타냈다고 기억했다. 당시에는 다들 김만배가 각 기자실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 팀원들을 만나 격려하거나 업무 관련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장동 사건이 터지고 난 뒤 돌이켜 보면 그 중 상당수는 검사나 판사들을 만나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대장동 사건이 불거진 이후 한 검찰 고위 간부 출신 변호사는 “김수남 전 검찰총장이 2014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있을 때 김만배가 나한테 뜬금없이 인사 부탁할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 이야기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며 “그때는 터무니없는 말 같아서 그냥 흘려듣고 말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진짜 인사 청탁을 넣어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법조를 출입했던 E기자는 “내가 F부장판사와 밥을 먹고 커피를 한 번 산 적이 있는데, F부장판사가 웃으면서 ‘내가 기자한테 얻어먹어 본 거는 이번이 두 번째’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내가 ‘누가 사든가요’라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길래 ‘혹시 만배형이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그랬다”면서 “다시 내가 ‘만배형이 냈으면 세게 냈겠는데요. 나는 커피지만 그 형은 돈 많은데’라고 얘기했더니 ‘밥을 사더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E기자는 “또 내가 들은 얘기는 김만배가 판사나 검사들한테 술을 사거나 골프 자리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는데 판검사들이 누가 돈을 내는 자리인지 꺼림칙해 참석할지 망설이면 김만배가 ‘내가 내는 자리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오시라’, ‘기자한테 얻어먹은 걸로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난 쪼잔하게 기업들 불러서 대신 돈 내라고 안 한다’고 얘기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김만배는 술자리를 만들어도 열심히 폭탄주를 제조해서 돌렸을 뿐, 자신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술을 삼가야 할 건강 상태였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술을 마시려고 술자리를 만든 게 아니라 정보를 얻으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를 아는 법조계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 사람의 말이다.

“김만배의 본질은 로비스트에요. 김만배 뿐 아니라 모든 로비스트는 원래 룸살롱에 가도 술을 안 마셔요. 그 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야 하는데 취해서 기억이라도 끊어지면 어떡하라고 술을 마시겠어요?”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원 기자실에서 그의 입지도 점차 강화됐다. 머니투데이는 2011년 통신사 뉴스1을 설립하고, 2014년 민영 뉴스통신사 뉴시스를 인수했다.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JTBC를 비롯한 종편사들이 대법원 기자단에 가입할 무렵인 2015년말께, 뉴스1과 뉴시스도 대법원 기자단 출입투표를 통과했다. 설립된지 얼마 안 된 뉴스1이나 십수년 동안 대법원의 벽을 넘지 못했던 뉴시스가 모두 대법원을 출입하게 된 것이다.

법조기자단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가려 했던 김만배는 법조 기자들 중에서도 언젠가 자신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유력 언론사 기자들, 그 중에서도 자신에게 배타적이지 않은 기자들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았다. 꽤 오랜 기간 대법원 기자단 간사를 맡았던 배모 기자(당시 모 방송사 법조팀장)와의 친분을 중요하게 활용했다. 김만배는 배 기자를 2019년 머니투데이로 데려와 법조팀장 자리를 물려주고 사회부 선임기자(부국장대우)로 자리를 옮겼다. 배 기자는 훗날 대장동 사건에서 ‘천화동인 7호’ 소유주로 등장했다.

지난달 17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는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다만 법조기자단에 등록된 언론사는 42곳(올해 2월 기준)인데 이 가운데 김만배와 친하게 지낸 기자는 일부에 불과했다. 김씨의 ‘기자답지 않은 모습’ 때문에 오히려 멀리했다는 기자도 여러 명 있다.

G기자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모 유력지 정치부에서 법조팀장으로 발령나 김만배와 같은 시기 대법원을 출입했다. G기자의 회고다.

“내가 법조팀장으로 인사발령을 받고 기자실에 나간 날, 김만배가 먼저 나한테 자기 소개를 하면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더라. 대법원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는데, 기사는 잘 안쓰면서 마당발인 전형적인 지방지 고참 기자 스타일이었다.”

그는 김만배가 두 번 정도 점심을 샀다고 기억했는데, 그것이 전부였고 더 이상의 식사나 술자리, 골프 초대 등은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김만배가 자기 ‘말빨’이 나한테 안 통하겠다고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G기자는 “나중에 타사 기자에게 듣기로, 김만배가 식사하자고 먼저 청한 건 내가 정치권 인맥이 있는 유력지 기자였고, 서울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더라”며 “지내면서 보니 김만배는 ‘영양가’ 없는 사람은 챙기지 않더라”고 말했다.

김만배는 성균관대를 나왔고, 남욱 등 대장동 세력의 다른 핵심들은 서강대, 이재명은 중앙대 출신이다. 이른바 SKY급 명문대는 없다. G기자는 “한국 사회에서 그들 인맥만으로 대장동급의 초대형 이권을 굴리고 보호할 수는 없다. 김만배가 권순일, 박영수 등 서울대 출신 최고위 법조인들에게 괜히 접근했겠는가”라며 “김만배는 대장동 일당 중에서 서울대 법조계를 뚫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라고 풀이했다.

김만배는 사람 좋고 밥 잘 사는 마당발 언론인으로 행세하면서, 급전이 필요한 타 언론사 법조 출입기자 3명에게 수억원씩의 거액을 빌려주기도 했다. 김만배에게 돈을 빌린 3명 역시 모두 서울대 출신이고, 소속사도 메이저 신문사이다.

김만배의 이면을 보여주는 다른 일화도 있다. 김만배가 뉴시스에서 수원 주재 기자로 일하다가 회사를 나올 때 자신의 투자금 일부와 체불된 월급 등 회사로부터 받아야 될 돈이 있었다. 받을 돈이 제때 지급되지 않자 법적 대응에 밝았던 김만배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뉴시스 기자들의 노트북을 대상으로 가압류 신청을 했다. 당시 뉴시스에서 전국부장으로 근무했던 H씨가 “네가 그러고도 선배냐. 어떻게 후배들이 일할 때 필요한 노트북에 가압류를 걸 수 있느냐”며 김만배와 몸싸움까지 벌였다.

나중에 H씨가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이직한 회사의 법조팀 후배가 김만배에게 ‘대법원 기자단에 가입할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린다’고 하자 김만배는 “왜 하필이면 그곳으로 갔느냐. 네가 그곳에 있는 한 못 도와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해당 회사 법조팀은 김만배가 대법원 기자실에 있을 때 출입투표를 했지만 대법원 기자단 가입에 실패했다. 자신과 관련된 이해관계와 친소관계에 철저했던 김만배의 일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대장동 게이트 최고 설계자로 드러나
경기도 성남시 판교대장 도시개발구역 모습.

김만배는 수원 토박이에서 시작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법조 기자라는 직업을 활용하여 자신이 활용할 인적 네트워크를 거미줄처럼 촘촘히 짜 나갔다. 이렇게 오랜 기간 쌓아올린 결과물이 대장동이라는 거대한 돈벼락의 철옹성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주가 되었다.

대장동 게이트의 최고 설계자는 검찰수사와 정영학 녹음을 통해 김만배라는 점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이재명도 김만배의 대장동 설계에서 인허가 부분에 이용된 말일 가능성이 점점 농후해지고 있다.

김만배는 대장동 개발 지분이 자기 몫이라고 끝까지 주장해야 하고, 이재명은 자신은 전혀 관여한 바 없고 숨은 지분 428억원도 자신 것이 아니라고 해야 서로 윈윈하는 결말을 맺을 수 있다. 결국 이 게임에서 최종 경제적 이익을 챙길 사람은 김만배 뿐으로, 이재명은 혐의에서 벗어나더라도 만신창이 상처 뿐인 결말이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용의자 떠벌이 킨트와 김만배의 이미지가 겹치는 대목이다.

1995년작 유주얼 서스펙트는 영화사 최고의 반전(反轉) 영화다. 베일 뒤의 인물 카이저 소제는 모든 범행을 설계하고 뒤에서 조종하며, 수천만 달러의 범죄 수익을 독차지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영화는 카이저 소제의 실체가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이 주목하던 두목급 악당이 아닌, 일당 중 가장 아닐 것 같던 떠벌이 킨트로 드러나면서 끝난다. 대장동 게이트에선 김만배가 떠벌이 킨트인 셈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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