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관광' 일본인 말에 충격…'엘리트 여성' 각성시킨 그날

안대훈 2023. 4. 1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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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일본 시모노세키 재판소로 향하는 위안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과 김문숙 이사장(왼쪽 첫 번째) 모습으로, 4월 경남 창원대 박물관 조현욱아트홀에 전시돼 있는 사진. 안대훈 기자


창원대,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전시


경남 창원대는 대학 박물관 내 조현욱아트홀에서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허스토리)’ 전시를 열고 있다. 지난 2월 15일 시작한 전시회는 오는 5월 19일 끝난다. 이번 전시는 ‘관부재판’과 원고 소송단을 이끈 고(故) 김문숙 전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 생애를 재조명하는 데 집중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위안부 피해자와 그의 손을 맞잡은 김 전 이사장 삶을 대변하는 두 여성이 손을 맞잡은 조형물도 보인다.

관부재판은 지방법원의 1심 판결이긴 하지만 일본 사법부가 자국의 위안부 제도 존재와 국가적 차원 강제 동원이었음을 인정한 재판을 말한다. 관부(關釜)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ㆍ하관)와 부산(釜山) 지역이다.


일본 사법부, 일본 ‘위안부 책임 인정’한 재판


1998년 4월 27일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방부가 ‘부산 종군위안부ㆍ여자 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사건’에 대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위안부는 1930년대부터 일본군에 동원되기 시작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 여자근로정신대는 군수 물자 생산에 동원된 노동 착취 피해자를 말한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원고 측에서 제기한 5가지 청구 중 위안부에 대한 ‘입법 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했다. 1993년 8월 일본군 위안부 모집 강제성을 처음 인정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고노 담화) 이후에도 일본 정부가 배상입법 의무를 다하지 않았단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2001년 3월 히로시마 고등재판소(2심)가 모든 청구를 기각했고, 2003년 3월 도쿄 최고재판소에서 이를 확정했다. 이 재판 과정은 2018년 배우 김희애가 주연한 영화 ‘허스토리(Herstory)’ 주제가 되기도 했다.


평균 65.8세…1만1101㎞ 오가며 증언


경남 창원대 박물관 조현욱아트홀에 전시된 '관부재판' 원고 모습. 안대훈 기자
부산에 살던 위안부(3명)ㆍ근로정신대(7명) 피해자 10명은 소송을 제기한 1992년 12월 25일부터 1심 일부 승소 판결이 나오기까지 23번의 공판에 참여하기 위해 26차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왕복했다. 이동 거리만 1만1101㎞에 달했다. 이들 평균 나이는 65.8세였다.

관부재판 소송단 이끈 한 여성기업가


고 김문숙 전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이사장. [연합뉴스]
관부재판 원고 소송단을 이끈 주인공이 고 김문숙 전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이사장이다. 192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그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영천과 진주에서 교사로 일하다 1965년 부산 아리랑관광여행사를 설립하면서 ‘부산 1호 여사장’이 됐다. 김 전 이사장이 “관광회사가 너무너무 잘됐지. 그때부터 나는 세계 일주를 열한 번이나 했다” 할 정도로 번창했다. 그는 1981년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를 설립해 성공한 여성경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1986년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여성의 전화를 신설했다. 김문숙은 당시 여성운동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남자도 여자도 똑같은 심장과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운동입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50년 만의 피눈물

경남 창원대 박물관 조현욱아트홀에 전시 중인 '관부재판과 끝나지 않은 Herstory' 자료. 안대훈 기자

김 전 이사장이 위안부ㆍ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60세가 넘어서였다. 1990년 ‘일본인 한국 기생관광’을 반대하던 그에게 한 일본인이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면서다. 그 일본인은 “옛날 조선 처녀들이 중국에 몸 팔러 갔을 땐 우리가 돈이 없어서 못 줬지만, 지금은 돈도 주겠다는데 왜 못하게 하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신고 전화를 설치, 피해 사례를 접수했다. 김 전 이사장이 여생을 위안부ㆍ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에 재능과 재산, 시간을 투입한 ‘각성’의 순간이었다. 당시 그가 쓴 수필『50년 만의 피눈물』에는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이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로 고통받는 동안 자신은 식민지 명문교에서 황민화(皇民化·황국 신민화) 교육을 받았던 것에 대한 회한과 성찰이 담겨 있다.

1991년 고 김문숙 전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이사장이 쓴 '50년 만의 피눈물' 친필 원고로, 4월 경남 창원대 박물관 조현욱아트홀에 전시돼 있다. 안대훈 기자

김 전 이사장은 2021년 10월 세상을 떠나기까지 위안부ㆍ근로정신대 문제를 알리는 데 힘썼다. 특히 2004년 부산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개관, 위안부ㆍ근로정신대 역사를 알리고 여성단체를 도왔다.

전시회를 준비한 신동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전시회장을 찾으면 관부재판과 그 속에서 김문숙이란 한 인간이 노력하고 헌신했던 게 역사 물줄기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창원·부산=안대훈 기자 an.dae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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