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20대 회사원 민준은 어떻게 보이스피싱 두목됐나
“큰돈 벌 수 있다” 필리핀행… 다단계처럼 조직원 늘렸다
“필리핀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최모(35)씨는 지인의 이 한마디에 혹해 20대 후반에 필리핀으로 건너갔다. 숙식까지 제공해준다던 이 일자리는 알고 보니 필리핀 마닐라 한인타운 인근에 근거지를 둔 보이스피싱 조직이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원래 이름을 버리고 ‘민준’으로 살기 시작했다. 민준파에 대해 잘 아는 한 제보자는 “고교 졸업 후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던 최씨가 범죄에 빠져든 건 필리핀으로 건너간 게 시발점이었다”고 전했다.
‘고수익’에 현혹된 최씨는 이 조직에서 보이스피싱 수법을 기초부터 배웠다. 그러다 이 단체가 와해되자 본인이 직접 보이스피싱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피해자 500여명, 피해액 108억원대 보이스피싱 조직 ‘민준파’의 시작이었다. 민준파는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 출범 이후 총책이 검거된 보이스피싱 조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최씨가 챙긴 범죄 수익은 파악된 것만 54억여원으로 추정되고, 확인된 조직원만 79명에 이른다.
14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최씨는 자신이 처음 보이스피싱 조직에 가담하게 됐던 방식과 같은 방법으로 조직원들을 모집해 세를 키워나갔다. 2017년 11월~2021년 11월 약 4년 동안 필리핀 마닐라 일대에서 활동했던 민준파 조직원 대다수가 범죄에 가담하는 줄 모르고 취업을 목적으로 필리핀으로 출국한 20, 30대 한국인 청년으로 파악됐다.
최씨와 한배를 탄 민준파 조직원들은 현지에 도착해 범죄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자발적으로 학교 동창, 연인 등 주변인에게 “필리핀에서 일하면 고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꼬드겨 범죄에 발 담그게 했다. 또 ‘단기 고수익 해외 알바’라는 식으로 인터넷 허위광고를 올려 조직원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신규 조직원들은 ‘업무 매뉴얼’을 받아 보이스피싱 전화 요령 등을 사전 테스트받은 뒤 간부급 팀장 지시에 따라 범행에 투입됐다. 업무 매뉴얼은 최씨가 이전에 몸담았던 보이스피싱 조직에서의 ‘룰’을 토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부실하다 느꼈던 부분은 보완하면서 업그레이드했다.
국민의힘 김웅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최씨 공소장을 보면 그는 민준파를 다단계 판매 단체와 유사하게 운영했다. 조직원이 ‘신참’을 데려올수록 범죄 수익 배분을 늘려주는 식이다. 조직원들이 스스로 한국의 신규 조직원을 끌어오도록 유도한 것이다.
최씨는 조직에 ‘직급’과 ‘경쟁’ 시스템도 도입했다. 그는 팀장 직책에 오른 조직원에게 더 많은 돈을 지급했다. 직접 피해자와 접촉해 사기를 치는 1차 상담원은 범죄 수익의 15%를 가져갔고, 그 위 팀장은 22~24%의 수익을 배분받았다. 최씨 본인은 범죄 수익의 50%가량을 챙겼다. 민준파를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조직이 빠르게 확장한 데는 이런 다단계 수법이 영향을 미쳤다. 조직원 관리에도 용이했다. 그러면서 범죄 수익은 최씨가 가장 많이 가져갔다”고 말했다.
최씨는 콜센터 조직원들을 ‘영팀’ ‘올드팀’ 등 10여개 팀으로 나눠 실적을 독려하는 동시에 팀 간 경쟁을 시켰다. 말단 조직원이 다른 조직원을 데려오면 팀 단위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신참이 가장 빨리 팀장으로 올라서는 길이기도 했다. 팀장이 된 간부급 조직원들은 단체 생활을 해야 했던 합숙소에서 벗어나 별도의 방도 제공됐다.
최씨는 이전 조직의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경찰 수사가 들이닥칠 경우를 대비해 조직 몸통이 드러나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조직원들은 철저한 ‘보안 교육’을 받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꼬리가 잡힐 가능성이 있는 활동은 금지됐고, 각자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조직 내에서도 서로 가명을 쓰게 했다. 또 범행에 사용되는 노트북을 외부로 반출하는 것 역시 금지하고 조직 노트북에 개인 ID와 USB 저장장치를 사용하는 것도 막았다. 조직원들의 숙소 밖 외출도 최소화했다.
민준파는 금융기관 직원을 사칭해 “저금리 대출을 해주겠다”며 피해자들을 모은 뒤 “대출 실행 전에 원금을 일부 상환해야 한다”고 속여 지정된 계좌로 돈을 입금받거나 국내 수거책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직접 현금을 건네받는 식으로 피해금을 빼돌렸다.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562명이다. 이들은 적게는 200만원부터 많게는 3억3000만원까지 돈을 뜯겼다. 피해 금액은 총 108억7800만원에 이른다.
경기남부경찰청은 2020년 인출책 등 국내 활동 조직원들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민준파의 존재를 인지했다. 이후 2년간의 추적 끝에 지난해 10월 총책 최씨와 부총책 이모씨를 현지에서 붙잡아 국내로 송환했다. 최근에는 민준파에서 텔레마케터로 활동했던 30대 김모씨도 추가로 붙잡았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달 31일 필리핀 경찰 당국에 체포된 김씨를 강제 송환했다.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도 지난해 12월 29일 국내로 압송해온 20대 중반 임모씨를 지난 1월 2일 구속했다. 임씨는 민준파뿐 아니라 다른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지금까지 검거한 민준파 조직원은 15일 기준 34명이다. 이 중 13명이 구속됐다.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6명도 국내로 송환될 예정이다. 파악된 전체 조직원 79명 중 나머지 35명은 해외 도피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먼저 검거된 이들을 통해 필리핀 등 해외에 숨어있는 조직원들에게 자수를 설득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남은 범죄자 송환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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