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헌책방 데이트 대작전(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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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데이트 약속이라니! 근처 학원에 다니는 남자 고등학생은 책을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신이 이 헌책방 단골처럼 보이도록 연기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그 여학생은 실제로 우리 헌책방에 자주 오는 단골이었던 거다! 여학생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오늘 여기서 남학생을 만난다고 말했다.
녀석은 한술 더 떠서 여학생에게 자기가 중학생 때부터 이 헌책방의 단골이라며 으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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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데이트 약속이라니! 근처 학원에 다니는 남자 고등학생은 책을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신이 이 헌책방 단골처럼 보이도록 연기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너무도 애절한 표정이라 거절하기 힘들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일은 처음부터 꼬였다. 작전 개시일인 토요일 오후, 여학생은 15분 정도 일찍 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여학생은 실제로 우리 헌책방에 자주 오는 단골이었던 거다! 여학생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오늘 여기서 남학생을 만난다고 말했다. “재미있겠다 싶어서 저도 여기 안다는 말은 안 했어요. 의외로 헌책방 단골이라니 너무 귀엽지 않아요?”
나는 처음엔 모르는 척했지만 하는 수 없이 여학생에게 이번 데이트 작전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여학생은 내 예상과는 달리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우리 둘은 남학생이 왔을 때 시치미를 떼기로 합의했다. 나는 이제 두 배로 난처한 심정이 됐다.
곧이어 남학생이 나타났다. “삼촌, 안녕하세요!” 뭐라고? 삼촌이라니. 아무리 단골손님 연기라고는 하지만 지나치다 싶었다. 나는 여학생을 슬쩍 곁눈질로 보고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녀석은 한술 더 떠서 여학생에게 자기가 중학생 때부터 이 헌책방의 단골이라며 으스댔다. 실제로 중학생 때부터 왔던 사람은 네가 아니라 이 여학생이란다. 제발 허세는 그만 부리렴.
여기서 진짜 사건이 터졌다.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 것이다. 이건 미리 얘기가 안 된 부분이라 나는 당황했다. 그 제안이란 이렇게 정식으로 만난 게 처음이니까 헌책방에서 서로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책 한 권씩을 골라서 즉석에서 교환식을 하자는 거였다. 순간 남학생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여학생은 남학생 몰래 내 얼굴을 쳐다보며 눈웃음을 보냈다.
여학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을 골랐다. 괜찮은 선택이다. 그리고 남학생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다. 이 친구 진심인가? 아님 바보인가? 상대에게 고통을 받는 것으로 성적인 만족을 느끼는 ‘마조히즘’이라는 용어가 바로 이 소설을 쓴 자허마조흐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그러니 책 내용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남학생은 분명 멋진 클림트의 작품이 그려진 표지만 보고 이 책을 선택했으리라. 두 사람은 웃으며 책을 교환했다. 오오, 신이시여!
예상할 수 있다시피 두 사람의 만남은 그 한 번으로 끝이었다. 작든 크든 역시 거짓말은 좋지 않다. 더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라면 조금은 부끄럽더라도 자신의 본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게 옳다는 교훈만을 남긴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의 결과가 전부 나쁜 쪽으로 끝난 것만은 아니다. 두 사람 연애는 실패했지만, 이후로 남학생도 여학생만큼이나 자주 우리 헌책방에 들르는 진짜 단골손님이 됐기 때문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가 또 누군가를 여기로 데려오면 이젠 나도 거짓말할 필요 없이 단골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어 마음이 가볍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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