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별 볼 일 있는 어른
긴 머리를 빨래하듯 벅벅 감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온다. 칼바람 부는 겨울에야 목도리 대신 두를 수 있으니 그런대로 유용했으나 반팔을 입느니 마느니 하는 지금 날씨에 이깟 머리털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초여름을 앞두고 온몸의 털을 시원하게 밀어버린 언니네 강아지처럼 쇼트커트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차마 미용실로 향하지 못하는 이유는, 머리카락을 잘라냄과 동시에 내 청춘도 함께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긴 생머리에 반해 졸졸 쫓아갔던 여인의 정체가 알고 보니 록밴드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었다는 이야기만 보아도 머리카락이 지닌 힘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긴 머리카락으로 아무리 위장을 해도 마음가짐이 낡아 가는 것까지 막을 순 없는 노릇이다. 책장에 꽂혀 있던 ‘어린 왕자’를 꺼내 촉촉한 눈으로 읽다가, 비행기가 사막에 추락한 상황에서 양 한 마리만 그려 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 왕자의 언행에 열불이 터진다든지. 청년들은 쓰지 않는다는 MZ세대라는 단어를 남발하며,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스스로가 그 세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내심 기뻐하는 걸 보면 나도 아줌마가 다 됐구나 싶다. 그럼에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 많은 방황과, 그 많은 바람둥이와, 그 많은 오해와 시기와 질투를 무슨 수로 또다시 겪어 낸단 말인가. 단 하루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걸 보면 지금의 삶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쓸데없는 신세 한탄은 이제 그만 거두고 괜찮은 어른으로 자리매김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껏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살아왔기에 이대로라면 미래에는 별 볼 일 없는 늙은 인간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별 볼 일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를 해야 하나? 아냐, 내 코가 석 자인데 기부는 무슨 기부. 그래, 돈 대신 몸으로 봉사가 좋겠다! 보자, 보자. 어디에서 무슨 봉사를 해야 하나….’ 기부든 봉사든 어느 하나라도 행동으로 옮길 기미 전혀 없이, 꼼짝없이 드러누운 채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나를 벌떡 일으킨 건 현미 선생님의 별세를 알리는 뉴스였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명복을 비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황망함을 감출 길 없어 말을 잇지 못하는 문장과 힘찬 노래를 더는 듣지 못해 아쉬워하는 문장 사이에서 그녀와의 짤막한 추억을 이야기하는 댓글들에 유독 눈이 머물렀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편의점에 종종 들르셨는데 매번 구운 계란과 바나나 우유를 사 주셔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같은 동네에 살아 오다가다 마주치곤 했는데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인사해 주셔서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일이 있는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일이 잊히지 않는다. 그러고는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좋은 분이셨다고 말이다.
당신은 잊었을지도 모를 작은 친절이 하나하나 모여 좋은 사람으로 회자되는 모습이 가슴을 울렸다. 그동안 나는 스치는 인연을 어찌 대해 왔을까. 내가 만일 세상을 떠난다면 그들은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기억해 줄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치면 입이라도 맞춘 듯 어색해하며 시선을 피하는, 함께 수련하는 요가원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먼저 인사를 건넨 적 없는, 저 멀리에서 사람이 걸어오는 걸 분명 보았음에도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러 버리는 내 모습이 차례로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부터라도 작은 친절을 모아가다 보면 나도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으려나. 그래, 해 보자.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좋은 하루 보내시라며 눈인사를 했다. 나보다 그가 더 겸연쩍어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건 성공! 친절 도장 한 개 적립이다. 요가 수업이 끝난 후 사방으로 고개를 숙여가며 나마스테를 연발했다. 이 여자가 웬일이래, 하는 눈빛을 받기는 했으나 하여튼 성공! 친절 도장 또 한 개 적립이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또 다른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맞잡은 엄마에게 몇 층에 가시느냐 물었다. 대답을 들은 내가 버튼을 누르자 돌아오는 건 감사하다는 인사가 아닌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내가 누를 건데!” 이건 성공일까 실패일까. 에라, 모르겠다. 친절 도장 반 개 적립이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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