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방’에 모인 청년들 …“절약도 맞들면 낫다!”

서혜원,김영은 2023. 4. 1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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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처지 흔쾌히 인정하고 노력하는 청년세대
임명호 교수 “기성세대가 오히려 좀 배워야”


“물 - 500원”
“오후에 비 온다는데 좀 더 기다리시지 그랬어요.”

지난 11일 카카오톡 오픈채팅 ‘거지방’에 올라온 대화다. 참여자들은 웃음으로 공감했다. 이달 초부터 청년들 사이에서는 카카오톡 오픈채팅을 중심으로 여럿이 함께 절약을 실천하는 일명 ‘거지방’이 관심을 끌고 있다.

‘거지방’에서 이용자들은 단지 지출 내역을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의 충동구매를 막아주거나 돈을 절약하는 방법도 공유한다. 이미 소비한 항목에 대해서 따끔한 질책도 내린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거지방에서 생긴 웃긴 일화들은 이달 초부터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퍼지면서 인기를 얻고 있다. 14일 기준 ‘거지방’으로 검색되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은 500개를 넘어섰다. 이용자 제한이 100~200명인 방도 이미 인원이 꽉 차서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직접 거지방을 운영하는 개발자 서지우(22)씨는 “친구의 권유로 거지방에 참여하고자 검색해보니 인원이 꽉 차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없었다”며 “직접 운영해보고 싶어서 방을 만들었다”고 했다.

방마다 운영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주로 고정비를 제외한 한 달 치 지출 목표를 세우거나 하루 지출 금액에 한도를 두는 식으로 운영된다. 닉네임 옆에 한 달 누적 소비를 기록하기도 한다. 한 달 지출 금액이 가장 많은 사람은 닉네임을 ‘거지왕’으로 바꾸고 자필 사과문을 올려야 하는 등 벌칙을 주는 경우도 있다.

“절약도 맞들면 낫다”…당근과 채찍의 거지방
이용자들은 혼자서는 절약을 실천하기 어렵지만, 여럿이 함께하니 효과적이라는 반응이다. 취업준비생 이다윤(23)씨는 “여럿이 소비 내역을 공유하면 좀 더 절약 정신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참여하게 됐다”며 “필요 없는 소비에 대해 서로 딱 잘라서 지적해주니 도움을 주고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성별이나 나이에 제한을 두는 채팅방도 있다. 연극 관람이나 팬덤 활동 등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방을 만들기도 한다. 같은 대학 학생들을 모아 거지방을 개설한 강규빈(20)씨는 “비교적 돈을 적게 쓴 사람을 보면 동기 부여가 된다”며 “같은 학교 학생들끼리 배송비 부담을 줄이고자 공동 구매를 하는 등 지출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거지방은 자조적인 농담으로 회원들끼리 서로 감시하는 재미도 있다. 기자가 직접 거지방에 들어가 “쇼핑(화이트진) - 39000원”이라고 보내자 “패스트패션. 환경파괴”라는 단호한 꾸중이 돌아왔다.

대학생 박지우(23)씨는 “같은 ‘거지’끼리 있는 방에서 누군가 돈을 많이 쓰면 ‘기만’이라고 질책한다”며 “다른 사람들이 돈을 썼다고 할 때마다 서로 꾸중하는 게 거지방의 재미”라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청년들이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하게 본인을 인정하는 데서 성취감을 얻으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며 “기성 세대들은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 얘기도 못 했을 텐데, 어떤 측면에선 쪼잔해 보여도 오히려 그걸 감수하고 실행하는 세대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런 점은 기성세대가 오히려 좀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거지방에서 주고받는 채찍질의 효과는 톡톡하다. 한 이용자가 펭귄 인형 사진을 올리며 “사고 싶은데 말려달라”고 하자 다른 이용자가 “캐릭터 분장하고 같은 자세로 사진 찍어서 올리면 승인해주겠다”고 답했다. 고등학생 김세은(18)씨는 “지출 욕심을 버리고 욕먹을 각오로 들어왔다”며 “사람들에게 지출 내역을 공개해 따끔한 충고를 들으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단순히 소비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현명한 소비를 하도록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동영상 볼 때 핸드폰 세워두게 그립톡 사고 싶다”는 이용자에게 간이 거치대를 만드는 방법이 담긴 동영상 링크를 보내주는 식이다. 또 커피 교환권을 저렴하게 구매하거나 무료로 카카오톡 이모티콘 받는 방법을 공유하기도 한다.

거지방 이용자들은 함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자는 마음도 공유한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택시 타고 간다. 죄송하다”는 이용자에게는 “몸 아픈 거로 사과하지 말자. 건강이 우선이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학생 권도경(21)씨는 “한 이용자가 ‘커피/1500원(시험기간)’이라는 채팅을 보내자 다른 분이 ‘시험 잘 치세요!’라고 응원해주는 등 분위기가 훈훈하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거지방 참여자들의 주 이용자 연령층이 관계 맺는 방식에 주목했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Z세대는 서로 같은 취향을 가진 불특정 다수가 익명으로 모여 소통하면서 관계를 맺는다”며 “마치 마라톤의 ‘페이스 메이커’를 두듯이, 거지방 참여자들은 이를 동기부여 체계로 활용해 ‘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청년 ‘절약 트렌드’ 언제까지 계속될까?
거지방에 가입한 이들은 최근 몇 년 새 치솟아버린 물가에 대응하고자 점심값과 커피값 등 기본적인 지출부터 줄이며 허리끈을 졸라맸다. 권도경씨는 “물가가 너무 올라 지출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에 거지방에 들어왔다고 했다. 김세은씨는 “학생이라 해도 경제관념이 중요하니깐 지출관리에 대해 무관심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참여 동기를 전했다.

실제로 최근 소비자 물가의 상승으로 경제력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청년층이 받는 타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서 15~29세 청년층의 경제고통지수가 25.1로 모든 세대(평균 16.3)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경제고통지수는 물가 상승률과 연령대별 소비지출 등을 통해 국민이 느끼는 경제적 어려움의 수준을 나타낸 지표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이런 ‘절약 트렌드’가 앞으로도 지속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연구위원은 “국내의 경기 둔화 추세가 반등하려면 최소 6개월에서 많게는 몇 년이 걸릴 것”이라며 “그동안은 청년들의 절약 실천이 유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용자들도 거지방을 계속 이용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학 시절에 돈을 꾸준히 모아 어머니와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권씨는 “(거지방이) 돈을 절약하는 데 생각보다 큰 도움이 돼서 방이 비활성화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용하고 싶다”고 전했다. 가족들에게도 ‘거지방’을 추천했다는 이다윤씨는 “거지방이 돈 절약하기 딱인 것 같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쭉 이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혜원 김영은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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