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와 대면할 것만 같은 동굴
[차노휘 기자]
▲ 코우리 대교 |
ⓒ 차노휘 |
오키나와 여행하면 일반적으로 추라우미 수족관, 만좌모 등을 떠올린다. 그만큼 풍광이 좋다고 하는데, 걸어서 오키나와 한 바퀴를 돌려고 작정한 나도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 만좌모 |
ⓒ 차노휘 |
만좌모(Manza mo, 万座毛)는 18세기 초 류큐 왕이 방문했을 때 만 명도 앉을 수 있는 초원이라고 말한 것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천연 잔디가 넓게 깔려 있다. 나는 되도록 느린 걸음으로 초원 한 바퀴를 돌았다. 코스가 짧기도 했지만 시원을 알 수 없는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살아오면서 묻혀왔던 찌꺼기들을 날려 버리는 듯 해서 좀 더 그곳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융기 산호초가 만들어 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코끼리 옆얼굴 형상이 흥미롭기도 했다. 일몰이 코끼리 코 부분에 걸리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하는데, 나는 환상적인 분위기 대신 그 근처에 있는 다른 포인트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바람이 너무 거세서였다.
걸어서 16분 거리에 'Mermaid's Grotto'가 검색되었다. 인어 동굴 정도로 해석해도 될까. 일단 가보기로 했다. 30분이 지나면 일몰 시간인 5시 47분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인어 동굴로 걸어가는 동안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었다. 만좌모도 한적한 시골 마을에 외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나마 만좌모는 이름이 나 있는 곳이어서 방문객이 더러 있어서 도로가 잘 닦여 있지만 인어 동굴 가는 길은 그렇지 않았다. 일차선 도로에 양쪽으로 비닐하우스가 군데군데 있는 들판이었다. 간혹 억새풀 군락이 자리했다. 한 사람 정도 감쪽같이 살해하고 매장해도 모를 그런 곳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보고 싶은 곳은 봐야 직성이 풀리니.
구글맵이 가리키는 위치에 거의 도착했지만 어디에도 인어 동굴 같은 것은 없었다. 헛걸음인가 싶었을 때, 차에서 내린 건장한 남자 셋이 캠핑 장비를 챙겨 시커멓게 변해가는 넝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저곳이 그곳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가 보았다. 맞았다!
▲ 인어동굴 |
ⓒ 차노휘 |
▲ 인어동굴 |
ⓒ 차노휘 |
뭔가 잘못 밟으면 인어공주가 사는 곳으로 빠져버릴 것 같아서 나는 그곳에서 조심조심 걸었다. 용암이 흘러서 굳은 곳이라, 바닥이 울퉁불퉁 해서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사진만은 열심히 찍었다. 생생한 현장감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다 담을 수 없었지만 이미 나는 그 야생적인 장소에서 인어공주와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밤에는 얼마나 더 파도 소리가 크게 들릴까, 라는 생각에 캠핑 준비를 해온 서양인 남자 셋을 잠깐 부러워하기도 했다. 셋이 모였으니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냐 싶었다. 다음날 인어 공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침 신문에 남자 셋 실종, 뭔 이런 기사가 뜨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인어공주가 요술을 부리기 전에 그곳을 떴다. 14분 걸어서 6시 30분에 120번을 탔다. 30분 타고 도착한 나고 시는 버림받은 얼굴을 한 낮과 달리 야광 장식물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아예 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햇살 아래 스산한 건물은 근사한 식당으로 살아나 있었다. 흡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이 세계와 저 세계로 공간 전환되는 그런 마법을 인어공주가 나를 위해서 부린 것도 같았다.
▲ 밤에 환하게 밝혀지는 나고 시 |
ⓒ 차노휘 |
여행을 다녀와서 돌이켜보면 계획에 없던 일정이 좀 더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전 조사 없이 방문했던 장소나 우연히 만난 현지인과의 친분이 그랬다. 아마도 마음의 준비 없이 맞이했기에 밀려오는 감정 등이 더 폭발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야가지 섬과 코우리 섬을 잇는 코우리 대교를 건넜을 때도 그랬다.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72번 버스를 40분 정도 타고 대교까지 20분 정도, 재미없는 길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코우리 대교는 이미 봤던 풍광보다 더 멋지게 아가지 섬과 코우리 섬을 잇고 있었다.
오키나와는 아주 맑고 투명한 바다와 아름다운 산호초, 그리고 토파즈색 물빛이 인상적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에메랄드 빛 물빛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바다정원이라고 해야 할까. 바다 표면에 떠 있는 듯한 조그마한 바위산은 누군가가 예쁘게 가꾼 수석이 있는 정원수와 같았다.
나는 장식장 같은 바위산과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가르는 수평선을 보며 코우리 섬을 향해 대교를 부지런히 걸었다. 부지런히 걸을수록 섬은 더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눈으로 훑은 대교는 고작 한 뼘이었는데 나는 그 한 뼘을 장장 속보로 한 시간이나 걸어야 했다.
도착하고서도 내 발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목표한 섬 반대편에 있는 하트바위를 보기 위해서 섬 중앙을 가로질러갔으니까. 야트막한 산을 넘어야 했다. 산등성이에 세워진 펜션을 지나 막판 내리막길은 길은 있었지만 팬데믹 동안 왕래가 없었던 듯 수풀로 우거져 있었다.
▲ 추라우미 수족관 |
ⓒ 차노휘 |
코우리 섬을 떠나서 가로 22.5m 세로 8.2m인 영화 스크린보다 더 큰 세계 정상급의 수조 안에서 거의 8m에 이르는 상어와 열대어들이 코앞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장관을 추라우미수족관에서 홀리듯 봤다.
▲ 하트 바위 인근에 있는 사랑 운세 뽑기 |
ⓒ 차노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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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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