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 8000통의 탄원서, 그녀의 죽음에 국민은 분노했다
[이준목 기자]
스토킹과 데이트 폭력은 이른바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로 불린다. 한국에서도 최근 노원구 세 모녀 살인사건, 신당역 지하철 역무원 살인사건 등을 통하여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가해자는 '사랑'이라고 주장하지만,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은 그저 '공포'일 뿐이다. 그리고 스토킹은 보통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파국으로 가는 전조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피해자의 영혼은 고립되어 서서히 메말라간다. 지난 2016년,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가해자의 광기 어린 집착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살인사건은, 지금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4월 13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74회는 '가락동 살인사건-53일간의 살인' 편을 통하여 사랑으로 포장된 스토킹 범죄의 위험성에 대하여 조명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 SBS |
2016년 4월 19일 낮 12시,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백주대낮에 아파트 단지에서 한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뛰쳐나오고, 그 뒤를 한 남성이 추격해온다. 그녀은 '살려달라'며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남자에게 붙들려 넘어지고 만다. 이를 목격한 경비원과 주민들이 황급히 저지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흉기를 꺼내들며 위협한다. 잠깐 멈칫하는 사이에 손쓸 틈도 없이 남자는 여자에게 잔혹한 칼부림을 벌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여성을 버려두고 곧바로 도망쳤다. 주민들이 추격에 나섰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해버렸다. 출혈이 심했던 여성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도망치던 피해자가 붙들려 살해되는 순간까지 당시의 참상은 현장에 있던 아파트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백주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아파트 한복판에서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끔찍한 비극, '가락동 아파트 여성 살인사건'은 국민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경찰은 수사에 나선 지 24시간 만에 도주한 범인 한아무개씨를 체포했다. 그리고 범인의 정체는 놀랍게도 바로 피해자의 전 남자친구였다.
피해자 김정은씨는 사건 당시 31세로, 강남의 한 치과에서 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은씨는 범행 1년 전인 2015년 5월, 한씨를 처음 만났고 한 달 만에 교제를 시작했다. 한씨는 자신을 미국 영주권자이자 유명 증권회사에 다닌다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연애 초기에 다른 커플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한 연애를 즐겼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하여 한씨의 과도한 집착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족을 미국에 두고 홀로 한국에 거주하던 한씨는 정은씨에게 지나치게 의지하고 간섭하면서 다툼이 심해졌다. 여기에 한씨는 사실 증권회사 직원이 아니었고 직장을 속인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정은씨는 남친에 대한 신뢰가 더욱 무너졌다.
정은씨는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만남 8개월 만인 2016년 2월, 한씨와 헤어질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한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며칠 만에 정은씨에게 계속 편지를 쓰고 전화를 보내며 집착을 드러냈다. 정은씨는 한씨와의 대면을 피했지만, 한씨는 이번엔 빌린 돈을 갚는다는 구실로 만남을 강요했다.
어쩔수 없이 나온 정은씨 앞에서 한씨는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다. 잠실대교 한복판으로 정은씨를 데려간 한씨는 돈봉투를 흔들며 "이것 때문에 나온 거지? 근데 못 줘, 네가 나한테 주는 위자료라고 생각해"라고 조롱했다.
이어 한씨는 "전에 만나던 여자도 너처럼 날 버렸거든? 그 여자랑 가족들까지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아쉽게 실패하고 그냥 다리만 부러뜨렸어. 근데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거야. 나하고 헤어지면 너하고 네 가족 다 죽여버릴 거야"라고 무서운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큰 충격을 받은 정은씨는 한동안 실어증까지 겪을 만큼 극심한 불안증세에 시달렸다. 언제 한씨가 자신을 찾아오고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직장 출근이나 정상적인 일상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정은씨는 이후로도 계속 걸려오는 한씨의 통화를 증거로 녹음하기 시작했다. 통화에서 정은씨는 "나를 놔줄 생각이 없는 거야?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된 거잖아"라고 호소했지만, 한씨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냐. 아니면 내가 무슨 짓을 했으면 좋겠어? 더 틀어지게 만들지마. 진짜 서로 더 힘들어질 수 있어"라고 위협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 SBS |
정은씨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직장에 출근하며 어떻게든 정상적인 일상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씨는 정은씨의 집과 직장 주변을 맴돌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넌 절대 행복하지 못해"라고 저주하기도 했다.
보다못한 정은씨의 부친이 한씨를 만나 그만 놓아달라고 간곡하게 설득하기도 했지만 한씨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한씨는 마지막 만남이라고 애원하며 정은씨를 만난 직후에는 "우리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거지"라고 돌변한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정은씨의 집 근처에서 전화를 걸어 자살을 암시하며 정은씨와 가족들의 반응을 떠보기도 했다.
녹취록에 따르면 한씨는 "벼랑이라고 살려달라고 이야기했는데 꼭 떨어트려야 직성이 풀리냐", "너 자극하지 마라 제발 좀", "나 아까 너희 집 계단에서 계속 서 있었어", "네가 불행해도 나를 만나주면 안돼?"라면서 끊임없이 정은씨를 압박하고 괴롭혔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처럼 스토킹 범죄의 위험은 대부분 피해자가 '아는 사람'에 의하여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완전한 타인과 달리, 나에 대하여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당하는 고통과 두려움은 배가 된다. 집과 직장, 자신과 가족까지, 언제 어디서나 모든 곳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공포는 피해자를 고립과 단절로 몰아넣는다. 사건 발생 이후 유족들을 지원했던 송란희 한국 여성의 전화 대표는 "상대방이 나에 대하여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게 정말 큰 문제"라고 심각성을 지적했다.
운명의 그날, 사건 약 한 달 전부터 한씨의 연락이 뜸해지면서 정은씨 가족은 마침내 그가 마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가족들도 자리를 비우면서 그날 집에는 정은씨만 혼자 남았다. 그런데 돌연 한씨가 정은씨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정은씨의 집안에서 한 시간 정도 함께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정은씨가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갑자기 집을 뛰쳐나왔고 그 뒤를 따라온 한씨는 정은씨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대체 그날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당시 상황을 말할 수 있는 두 사람 중 정은씨는 이제 세상에 없기에, 증언은 한씨의 일방적인 주장만 남았다. 한씨는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려고 찾아갔다. 그런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도망가는 바람에,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진술했다.
한씨가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닌 '우발적 범행'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이유는 감형을 의식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CCTV에 남은 증거는 한씨의 주장과는 다른 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이 정은씨의 집에서 찾아낸 한씨의 가방에서는 흉기인 칼과 로프, 수건, 염산, 압박붕대 등의 증거물이 발견됐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정은씨를 납치하거나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씨는 여전히 "제가 자살하려고 준비했던 것"이라고 변명했다.
한씨는 사건 직후, 반성과 사죄는 커녕 변호사를 4명이나 고용하며 자기 방어에 나섰다. 법정진술에서는 피해자를 공포로 몰아넣은 스토킹과 살인에 대해서도 "사랑해서 그랬다"고 주장했다. 또한 적반하장으로 자신이 정은씨에게 먼저 이별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정은씨가 교제를 지속하길 원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또한 한씨는 "제가 피해자를 사랑하였는데, 피해자는 저의 사랑을 배신했다. 그래서 죽인 것"이라고 모든 원인을 정은씨의 탓으로 떠넘겼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한씨가 법정에서 변명을 늘어놓을 때마다 법정에서는 야유가 터져나왔고 유족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피해자 측 변호인이었던 구정모 변호사는 한씨의 행태에 대하여 "이런 스토킹 범죄가 왜 발생하는지, 왜곡된 시선이나 편견(피해자에 대한 책임전가, 사랑싸움이라는 안이한 인식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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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회한과 자책에 시달리던 정은씨의 부모님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호소하며 탄원서를 모으는 데 나섰다. 단일사건으로는 드물게 무려 3만 8000통의 탄원서가 모아졌다. 그만큼 국민들의 분노와 공감이 컸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매주 탄원서를 작성한 정은씨의 어머니는 "나에게 행복의 씨가 되어온 그 아이, 엄마가 고생한다며 엄마를 늘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면서도 존경한다던 그 아이, 우리들의 자랑할 수 있는 착하고 예쁜 딸"이라고 추억을 회상했다.
어머니는 "그날 출근길에 딸의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게 내 삶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살인자에게 도망치기 위하여 문밖으로 뛰어가던 딸, 딸이 지나간 길을 매일 지나야하는 고통, 주차장의 피가 이제야 빗물에, 펑펑 쏟아졌던 눈에 쓸려 사라지고 있습니다"라며 애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어머니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 딸을 두고 돌아와야 하는 죄많은 어미의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어미가 사랑하는 딸을 만나러 가는 날, 어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정은이에게 선물 하나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라고 절절한 모정을 전했다.
재판부는 범인 한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범행을 인정하고 초범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죄질이 무겁고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할 필요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한씨는 항소했지만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스토킹 문제에 대한 법적 공론화가 나온 것은 무려 1999년부터였다. 하지만 스토킹 범위나 피해 입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번번이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스토킹은 사랑싸움'이라는 안이한 인식과 '심각한 스토킹 행위는 협박이나 강요죄로 처벌하면 되지 않냐'는 반론에 막히며 번번이 폐기되곤 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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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은 그동안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처벌 가능한 '반의사불벌죄'로 분류되어 왔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합의만 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기에, 자연히 합의를 핑계로 피해자와 접촉을 시도하게 되고 또다른 스토킹이나 2차 가해를 유발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신당역 살인사건 역시 스토킹 처벌로 피해자에게 앙심을 품은 가해자가 저지른 보복살인이었다.
법무부는 신당역 사건 이후 스토킹 범죄의 반의사불벌죄 조항 삭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아직까지 이 조항은 유효하다. 또한 신당역 사건 이후 한 서울시 시의원의 "좋아하는데 그걸 안 받아주니까 폭력적인 대응을 한 것"이라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한 망언은,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여전히 스토킹 범죄를 단순하고 가볍게 바라보는 안이한 인식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스토킹의 진정한 무서움은 '살인의 전조'로도 불리기 때문이다. 정은씨의 죽음은 사망한 당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스토킹이 시작된 53일 전부터 차근차근 이뤄진 살인이었다. 우리 사회는 정은씨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시간과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책임이 있다.
사건 발생 이후 어느덧 7년이 흘렀지만 정은씨의 가족들은 아직도 그날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다. 스토킹 처벌법이 제정되는 데는 정은씨 가족처럼 피해자 유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목소리를 낸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은씨의 부모님이 남긴 "앞으로는 피해자 부모가 애쓰지 않아도 엄정한 법의 처벌이 내려지는 그런 세상이 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다.
스토킹은 절대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될 수 없다. 사랑은 '함께' 느껴야 하는 것이고, 내가 아니라도 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어야 한다. 연인과의 이별과정에서 스토킹이나 폭력없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며 무사히 헤어지는 '안전이별'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한 현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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