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대중과 만난 세계미술축제
[김형순 기자]
▲ 14회 광주비엔날레 이숙경 예술감독과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박양우 |
ⓒ 김형순 |
1988년 올림픽 때 대한민국이 세계 속 산업국으로 정식 데뷔하는 계기가 되는 행사였다면, 1995년 광주비엔날레는 우리가 세계 문화국으로 진입한다는 신호를 보낸 대사건이었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에 이바지한 백남준은 당시 한국미술의 수출과 세계화를 위해서 영업사원 제1호로 맹활약했다. 당시 한국미술은 세계미술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무명지대였다. 백남준이 초록 가방을 들고 광주에 온 해외작가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퍼포먼스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와 동행한 미국 백남준 테크니션 중 한 명인 '폴 게린'의 증언이다.
이제 이 아시아 최대 미술축제인 광주비엔날레(대표이사 박양우)가 14번째를 맞이했다. 예술감독으로 이숙경 테이트모던 국제미술 수석큐레이터가 선정되었다. 노자의 도덕경 '유약어수(柔弱於水)'에서 차용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가 그 주제다. 이는 광주의 저항과 화해 정신과 결합해 전 지구적 엉킴(entanglement)을 흐르는 물처럼 풀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 14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에 맞춰 국내외 언론간담회가 '거시기홀'에서 열렸다 |
ⓒ 김형순 |
이숙경 감독은 개막식 국내외 언론간담회에서 "이번에 기대하는 게 뭐냐?"고 묻자, "저는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냥 '뉴스를 보는 것 같은 것'이 아니면 좋겠다"며 "물론 일상에서 정치적 요구도 필요하지만, 예술가만 할 수 있는, 예술의 힘으로 풀 수 있는 것도 많다"며 "예술은 물처럼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근본적인 전환의 길로 바꿀 수 있다"라고 답했다.
이번 전시에서 이 감독은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에 뿌리를 둔 대안 가능성을 가늠한다. 그가 가장 서구적인 미술관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비서구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커 보인다. 서구 비서구의 경계를 넘어 그 속에 내재하는 연대과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위계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더욱 평등한 공동체와 기후위기를 함께 극복하자는 환경 이슈도 담고 있다.
전시 구성이 임펙트 하지는 않지만,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같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전시장마다 시대의 과제인 '은은한 광륜(廣輪, Luminous Halo: 인류에게 빛을 주는 저항과 연대)', '조상의 목소리(Ancestral Voices: 전통성 회복)', '일시적 주권(Transient Sovereignty 이주민 문제)', '행성의 시간(Planetary Times: 생태 환경 정의)' 같은 소주제를 붙였다.
이제 비엔날레 참가한 국내외 79명 작가 중 일부를 소개한다.
▲ 고이즈미 메이로(1976년생) I '삶의 극장' 5채널 영상설치. 가변크기 2023 |
ⓒ 김형순 |
먼저 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고이즈미 메이로(Meiro Koizumi)를 소개한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비디오 및 퍼포먼스 아티스트다. 광주에 고려인(중앙아시아 한인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이야기를 발굴해 워크숍으로 이끌고 이들의 모습을 5채널 비디오 영상으로 찍었다.
그는 1932년 카자흐스탄에 설립된 한국극장은 20세기 내내 이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창구 역할을 한 데 주목한다. 여기 사진 자료를 근거로 이야기 전개를 구성했다. 작가는 인간에겐 '연극적 충동'이 있으며, 역할극을 통해 자신의 환경과 정체성을 변화시키려는 속성이 있다는 '에브레이노프' 이론에 따라 광주 고려인 청년 15명을 퍼포머로 등장시켰다.
▲ 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 I '모든 삶의 기표' 2022. 전시장 바닥에 수화그림이 보인다. 사운드 설치 작품이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미국국립미술관에 소장된다.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 |
ⓒ 광주비엔날레 |
이번엔 신체장애가 있는 이들에게 빛을 전하는 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 작품을 보자. 이 작가는 베를린에서 작업한다. 재미 한국인 2세로 청각 장애가 있다. 그녀는 다양한 정보 매체를 활용해 음표, 드로잉, 그래픽,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만의 시각적 언어를 개발하고 의사 소통의 영역을 확장한다. 작곡을 위한 새로운 규칙도 발표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모든 삶의 기표'는 미국 수화인 ASL로 숫자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 수화는 그녀의 모국어나 마찬가지다. 들을 수는 없지만, 발화자의 미묘한 손짓에 따라 빈도와 시간과 나이를 보고 거기서 듣는 소리를 만지거나 상상할 수 있단다. 바닥에 부착된 개념어와 상응하는 ASL 영상은 신체의 동작과 그 의미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 김민정 I '페이징' 한지에 먹(Ink on paper) 132×190.5cm. 2022 |
ⓒ 김형순 |
김민정은 이탈리아 베니스, 프랑스 생폴드방스, 미국 뉴욕에서 맹활약하는 작가다. 자신의 피부처럼 느껴지는 한지를 사용한다. 그녀가 현대적인 것은 이 재료를 불에 태워 작은 조각으로 만든 후 큰 종이에 부착하여 삼차원적 콜라주를 제작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업은 이런 요소를 여러 층위의 시간성에 담아 화면의 입체감과 깊이를 만들어준다.
그녀는 한국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광주 출신이기도 하다. 먹물의 농담을 조절해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형상과 패턴을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태초 인간이 되는 해방감과 자유로움, 물아일체 교감을 맛본다. 작가는 이렇게 정신과 신체가 평정에 도달하는 세계를 추구한다.
▲ 엄정순 I '코 없는 코끼리(Elephant without trunk)' 300×274×307cm 철판, 양모, 천. 2023. 작가 및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 |
ⓒ 광주비엔날레재단 |
작가는 이 코끼리 조형물 프로젝트를 약 600여 년 전 인도네시아, 일본을 거쳐 한반도 전라도 끝 외딴 섬 '장도'로 유배되는 여정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실제 코끼리 크기로 제작했다. 130개의 섬유 조각으로 철 파이프 골조 위에 수천 장의 외피를 감싸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박서보 화백이 10만 달러(한화 1억 3천만원 상당)를 기부하면서 광주비엔날레 참여작가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박서보 예술상'이 제정되었다. 엄정아 작가는 그 첫 수상자가 되었다. 그런데 일부 미술계 이 상이 광주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그 후유증 걱정된다. 이 상 심사위원으로 테이트 모던 관장인 프란시스 모리스 외 4명이 참가했다.
▲ 불레베즈웨 시와니(Buhlebezwe Siwani) I '영혼 강림(The Spirits Descended=Yehla Moya)' 영상 스틸. 영상설치, 수조(pool with water)와 물. 10분 5초 2022. 이 작가는 2021년 스탠다드은행 청년 작가상 조형예술상을 수상 |
ⓒ 김형순 |
이번에는 아프리카 출신 여성 작가 불레베즈웨 시와니의 작품을 보자. 그녀는 아프리카 전통의례를 소재로 작업한다. 마치 우리 무당처럼 산 자와 죽은 자를 오가며 영적 치유자 같은 역할을 한다. 그녀는 우리 몸과 정신이 어떻게 땅과 물에 결부되어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고 길러지는지를 묻는다. 그러면서 자연에 깃든 영을 상상한 위 '영혼 강림'을 발표했다.
그녀는 선조 전통에 따라 약초를 캤고 여러 세기 동안 그런 자연과 균형 속 살아왔음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 회복도 주장한다. 또한, 페미니즘 관점에서 흑인 여성의 몸은 남아프리카에서 가부장적 틀을 심문하는 장소였음을 고발한다. 이 작가는 이렇게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이라는 공존을 주제를 다루는 인류학적인 작품을 한다.
▲ 산티아고 야오아르카니(S. Yahuarcani) I '위토토 세계관' 나무껍질에 천연염료와 물감. 210×410cm 2022. 위토토 족 학살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
ⓒ 김형순 |
이번에는 중남미 작품을 보자. 야오아르카니 작품은 콜롬비아 남부와 페루에 거주하면서 전형적 열대 밀림 문화를 가졌던 위토토 족의 독특한 여정을 찾아간다. 페루 아마존 회사가 수천 명의 선주민을 노예로 삼고 식민지하면서 강제 이주와 집단학살을 감행하며, 아마존 우림에서 고무를 채취하며 살아야 했던 생존자 후손이 겪는 트라우마를 주제로 한다.
위 작품은 무화과 나무의 양피지를 이어 천연염료로 채색한 회화다. 이 회화는 신들이 등장하는 신앙체계나 물고기의 기원에 관한 신화적 서사, 그리고 아마존 우림에 스며든 도시 풍경이 자아내는 동시대 환경 등 위토토 족이 영위하는 다양한 삶의 측면을 회화로 증언한다. 이런 비참한 역사도 이겨낸 위토토 족의 불굴의 정신을 작품에 담은 것 같다.
▲ 타렉 아투이(Tarek Atoui) I '엘레멘탈 세트(The Elemental Set)' 2021~2023. 광주비엔날레재단 제공. 작가는 관객과 공유하는 '소리와 진동 워크숍'를 제3전시실에서 매주 토요일 11시에 진행한다 |
ⓒ 광주비엔날레주재단 |
이번에 선보인 '엘레멘탈 세트'는 2019년 9월에 광주를 방문한 뒤 작가는 한국의 전통 타악기를 보고 현지의 악기장, 예술가, 공예가에게 작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해 지난 4년간 협업과 연구를 토대로 한 작품이다. 한국 전통 음악과 그 안에 내포된 철학을 녹여 다층적이고 역동적 과정으로 얻어낸 결과물이다. 사운드아트라는 현대미술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추신으로 한국실험예술 개척자 3인방 김구림, 이건용, 이승택의 관객 참여 작품을 소개한다. 원시시대 생존의 도구였던 바디페인팅이 문명시대에 어떻게 변형됐는지를 풍자한 김구림 작품, 작가의 몸을 예술로 보고 그걸 그리는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60년대 '작품에 절대 손대지 마라(觸手嚴禁)'라는 터부를 깬 작품을 재현한 이승택의 '무제'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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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광주비엔날레 참여작가 래리 아치암퐁(Larry Achiampong), 압바스 아크하반(Abbas Akhavan), 파라 알 카시미(Farah Al Qasimi, 마마 앤더슨(Mamma Andersson)*, 타렉 아투이(Tarek Atoui), 멜라니 보나조(melanie bonajo)*, 바킷 부비카노바(Bakhyt Bubikanova), 헤라 뷔육타쉬즈얀(Hera Büyüktaşcıyan)*, 에드가칼렐(Edgar Calel)*, 마리아 막달레나 캄포스-폰스(María Magdalena Campos-Pons), 장지아(Chang Jia), 흐엉 도딘(Huong Dodinh), 라티파 에샤크(Latifa Echakhch), 구철우(Cheol-woo Gu)*, 탈로이하비니(Taloi Havini)*, 제임스 T. 홍(James T. Hong), 홍이현숙(Hong Lee Hyun Sook)*, 스카이 호핀카(Sky Hopinka), 이끼바위쿠르르(IkkibawiKrrr)*, 아서 자파(Arthur Jafa)*, 테스 자레이(Tess Jaray), 정재철(Jeoung Jae Choul)*, 앤 덕희 조던(Anne Duk Hee Jordan)*, 강연균(Yeon-gyun Kang), 나이자 칸(Naiza Khan), 유키 키하라(Yuki Kihara), 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 김기라(Kira Kim),김구림(Kim Kulim), 김민정(Minjung Kim), 김순기(Soun-Gui Kim), 김영재(Kim Youngjae)*, 에밀리카메 킁와레예(Emily Kame Kngwarreye), 고이즈미 메이로(Meiro Koizumi), 압둘라예 코나테(Abdoulaye Konaté), 차일라 쿠마리 싱 버만(Chila Kumari Singh Burman), 이건용(Lee Kun-Yong), 이승애(Seung-ae Lee)*, 이승택(Seung-taek Lee), 킴 림(Kim Lim), 캔디스 린(Candice Lin) 등등 지면상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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