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부 이후 최악의 참패, '실사판 북산'이 된 캐롯

이준목 2023. 4. 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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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56점차 역대급 참패, 지금까지의 여정 헛되게 하지 말아야

[이준목 기자]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산왕과의 사투에 모든 힘을 쏟아낸 북산은 이어지는 3차전에선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했다.'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의 농구만화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다. 주인공팀인 북산은 전국 대회에서 디펜딩챔피언이자 최강팀으로 불우던 산왕공고와 혈전 끝에 극적인 대역전승을 거둔다. 하지만 전 경기에서 그야말로 전력을 쏟아부은 탓인지, 다음 경기에서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완패를 당하며 탈락한다. 만화 원작에서는 경기 장면 묘사 없이 단 두 줄의 문장으로 결과만 간략하게 설명하며 더 묘한 여운을 남겼다.

'돌풍의 팀' 고양 캐롯의 플레이오프 행보는 마치 '실사판 북산'을 연상시킨다. 지난 4월 13일 안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2-23 프로농구(KBL) 4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캐롯은 정규리그 1위팀 안양 KGC 인삼공사에게 43-99, 무려 56점차라는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56점차는 KBL 역대 한 경기 최다 점수 차 신기록이다. 종전 기록인 2014-2015시즌 정규리그 인천 전자랜드-서울 삼성전에서 기록한 54점 차(100-46, 전랜 승)를 뛰어넘었다. 또한 캐롯이 올린 43점은 역대 플레이오프 최소 득점이 신기록이기도 하다. 2011-2012시즌 울산 현대모비스, 2012-2013시즌 서울 삼성이 각각 한 차례씩 기록한 50점 기록을 깨고 최소의 PO 40점대 득점을 기록한 팀에 이름을 올렸다.

역대급 명승부로 기억될 울산 현대모비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가 남긴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운 불명예 기록이라 더욱 아쉽다. 올해 새롭게 창단한 신생구단 캐롯은 전력상 약체라는 예상을 깨고 창단 첫해 봄농구 진출에 이어, 첫 플레이오프무대에서는 상위 시드팀인 4위 현대모비스에 시리즈 역전승-업셋을 거두며 4강까지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임금 체불과 KBL 가입비 미납-PO 출전자격 박탈 위기 등 온갖 악재와 전문가들의 예상을 극복하고 이뤄낸 '언더독' 돌풍이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슬램덩크>의 북산을 연상시키는 만화같은 기적이었다.

4강에서 만나게 된 KGC는 김승기 캐롯 감독과 간판슈터 전성현이 바로 지난 시즌까지 몸담았던 친정팀이기도 하다. 김 감독은 캐롯 지휘봉을 잡은 이후 여러 차례 친정팀 KGC를 저격하는 발언을 이어가며 KBL 재정위로부터 '경고' 징계까지 받았을만큼 앙숙이 되면서 양팀의 이번 플레이오프 대결은 '김승기 더비'로 불리기도 했다.

전력상 KGC의 우세가 유력하기는 했지만, 옛 제자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승기 감독의 존재와 캐롯의 상승세를 고려할 때 만만치 않은 승부가 예상됐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캐롯은 생각보다 훨씬 무기력했다. 정규리그 1위로 4강에 직행하며 충분히 체력을 비축한 KGC에 비하여, 현대모비스와 6강 플레이오프를 최종전까지 치르고 올라오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캐롯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전반에 갈린 승부, 점유율에서 압도당하다

사실상 승부는 전반에 갈렸다. KGC의 초반부터 강한 압박으로 캐롯의 패싱 플레이를 무력화시켰고, 리바운드(51-26)에서 두 배 가까이 우세를 점하며 공격 점유율에서 캐롯을 압도했다.

캐롯은 1쿼터부터 9점(9-27)에 그쳤고, 2쿼터에 벌어진 점수차만 무려 27점차(25-52)로 캐롯이 올린 전반 득점보다 더 많았다. 설상가상 이정현과 김강선이 경기중 잇달아 부상을 당하는 악재까지 겹쳤다. 3쿼터 초반에도 점수차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김승기 감독은 다음 경기를 대비하여 주축 선수들을 제외하고 사실상 백기를 드는 결단을 내렸다.

캐롯은 1쿼터부터 4쿼터까지 KGC에 단 한 쿼터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3쿼터에는 무려 21점차(11-32)까지 밀렸고, 벤치멤버들만 나선 4쿼터에도 고작 7점(7-15)에 그치며 KGC에 사실상 경기 내내 농락당했다. 캐롯은 이날 장기인 3점슛을 무려 50개나 난사했으나 을 가른 것은 고작 7개로 성공률은 14%에 그쳤다. 야투는 20.6%(13/63), 자유투도 58.8%(10/17)에 불과했다.

여러모로 캐롯 창단 이래 최악의 경기였다. 이날 경기전까지 플레이오프 승률 1위(현재34승 18패)를 달리던 김승기 감독에게도 사령탑 데뷔 이래 이 정도의 졸전과 참패는 처음이었다.

물론 캐롯의 상황을 고려하면 1차전의 완패와 후반 '경기 포기'는 부득이했던 측면이 있다. 선수층이 얇은 캐롯으로서는 불명예 신기록이나 팬들의 시선을 고려하여 끝까지 주전들의 출장을 고집했다면 2차전 이후의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김 감독은 "팬들에게 미안하다"면서도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오늘 경기를 끝까지 따라가려고 했다면 결국 다음 경기도 없다고 봤다. 2차전은 총력전으로 나가겠다.며 설욕을 다짐했다.

관건은 체력과 식스맨이다. 캐롯은 높이가 약한 팀 사정상, 선수들이 많이 뛰는 농구를 할 수밖에 없다보니 체력소모도 상대적으로 더 큰 편이다. 그동안 팀을 이끌어왔던 디드릭 로슨(9점)과 이정현(4점)의 체력이 방전되면서, 1차전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캐롯 선수는 전성현(11점)뿐이었다.

정규시즌 막바지부터 돌발성 난청 증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성현은 6강플레이오프 후반부부터 복귀했으나 아직 정상 컨디션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20분 정도를 소화하는 것이 한계치다. 전성현은 1차전에서 23분 41초를 소화하며 3점슛 3개(9개 시도)를 성공시켰다.

캐롯은 벤치싸움에서도 KGC에 비하여 열세다. 몸상태가 불완전한 전성현보다도 믿을만한 득점원이 없는 상황이라는 게 더욱 첩첩산중이다. 식스맨들이 주전들의 체력적-정신적 부담을 얼마나 덜어주느냐에 따라 2차전의 경기력도 좌우될 전망이다.

4강전 결과를 떠나 캐롯이 여기까지 온 것은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허무한 참패는 자칫 그동안의 여정까지 빛바래게 만들 수도 있다. 과연 캐롯은 남은 플레이오프서 <슬램덩크>의 북산식 엔딩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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